희귀질환 환자들이 치료제가 있어도 보험의 문턱에 막혀 치료 기회를 잃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아 중심으로 설계된 급여 기준과 까다로운 사전승인, 유지 기준이 성인 환자와 경계 환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급여 사각지대’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신경섬유종증(NF1) 환우회의 시위와 척수성 근위축증(SMA) 환자들의 사례는 현 제도가 가진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21일 신경섬유종 환우회(회장 임수현)는 서울 서초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같은 질환, 같은 조건임에도 환자마다 급여 적용 결과가 달라지고 있다”며 불명확한 급여 기준의 개선을 촉구했다.
NF1 치료제인 ‘코셀루고(성분명 셀루메티닙)’는 아스트라제네카와 MSD가 공동 개발한 MEK 억제제로 2020년 미국 FDA와 유럽 EMA에서 소아 NF1-총상신경섬유종 치료제로 신속 승인됐으며, 미국·유럽 모두 소아 환자 대상 보험 급여가 적용되고 있다.
한국은 2021년 허가 후, 2024년부터 3~18세 소아 한정 급여만 인정되고 있다.
성인이 된 환자는 진료의가 ‘투여가 불가피하다’는 소견서를 제출해야 제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불승인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게 환우회의 주장이다.
임수현 회장은 “신경섬유종증은 성인이 된다고 멈추는 병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변이 커지고 합병증이 심해진다”며 “소아 중심 기준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아산병원 이범희 교수도 “기준은 존재하는 것 자체보다 공정하고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장 혼란을 줄일 수 있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SMA 치료제들…“유지 기준의 벽”
비슷한 문제는 척수성 근위축증(SMA) 환자에서도 나타난다. 바이오젠의 스핀라자(성분명 뉴시너센), 로슈와 PTC Therapeutics 공동 개발한 에브리스디(성분명 리스디플람)는 연령 제한이 완화되면서 급여 적용 범위가 넓어졌지만, 사전승인과 유지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스핀라자는 미국·유럽에서는 영아부터 성인까지 광범위한 환자군에서 보험 급여가 적용된다.
한국은 2019년 소아·중증 환자부터 급여 적용을 시작했으나, 기능척도 유지·개선을 증명해야만 투여를 이어갈 수 있어 승인율이 절반 이하에 머물고 있다.
에브리스디 역시 미국·EU 주요국에서는 광범위 연령군에서 보험 적용이 이뤄지고 있어 환자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한국은 2021년 허가 2023년 급여 적용됐으나 스핀라자와 동일하게 사전승인·유지 기준 심사를 거쳐야 한다.
심평원 자료에 따르면 SMA 치료제의 사전승인 승인율은 절반에 못 미치고, 이의신청 인용률도 극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투여를 유지하려면 일정한 기능척도(HINE-2, HFMSE 등)에서 개선이나 유지가 입증돼야 하는데, 질환 특성상 일시적 변동이 많은 환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되는 것이다.
서울의 한 신경근육질환 전문의는 “진행성 질환에 동일한 유지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환자가 탈락할 수밖에 없다”며 “기준이 임상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심평원은 “희귀질환 약제는 환자별 상황이 달라 사례별 판단이 불가피하다”며 “기준은 국제 가이드라인과 근거를 기반으로 설정됐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희귀질환 약제, 왜 급여 사각지대 생기나
희귀질환 약제의 급여 사각지대는 크게 세 가지 병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먼저 소아 중심 급여 규정의 경우 성인 이행기의 공백이 발생하고, 사전승인 제도는 승인율이 낮으며 불승인 시 이의신청 구제 성공률도 극히 저조하다. 또한 엄격한 유지 기준으로 인해 진행성 질환의 특성상 치료 효과를 입증하지 못해 중단되는 환자가 발생하게 된다.
정부가 도입한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은 등재 속도를 높였지만, 급여 적용 여부를 자동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관련 환자단체와 학회에서는 ▲성인 이행기 특례 규정 ▲질환 맞춤형 유지 기준 ▲이의신청 제도 실효성 강화 ▲실사용데이터(RWD) 기반 재평가 ▲성과연동형 급여 확대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실제 미국·유럽의 경우 NF1·SMA 치료제 모두 허가 즉시 보험 급여가 연계되는 경우가 많고, 연령 제한이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다. 또한 환자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위험분담제·성과기반 계약 등을 적극 활용한다.
반면 한국은 급여 확대가 허가 후 수년이 지나서야 이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아 중심 규정과 까다로운 사전승인·유지 심사 때문에 실제 접근성은 선진국 대비 크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국회와 정부도 일부 제도 개선을 검토하고 있지만 구체적 성과는 아직 미비하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재정 건전성’과 ‘환자 접근성’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이 필요한 만큼, 유연하고 투명한 급여 체계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