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역 필수의료 인력난 해법으로 내세운 '지역의사제'가 국회에서 속전속결로 통과되면서 2027학년도 도입을 향한 시계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원 내 선발, 의무복무 10년 등 큰 틀만 정해졌을 뿐 전문과별 수요 추계, 보상체계, 근무·정주여건, 전달체계 개선 등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설계가 비어 있어 의료계와 지역 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강제배치 중심의 구조로는 일본 지역정원 초기 실패를 되풀이할 것"이라며 시행령 단계에서 실질적 보상·배치 기준이 완성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지난 18일 '지역의사의 양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17일 전체회의 공청회 직후 바로 소위 심사가 이뤄졌고, 20일 보건복지위 전체회의에서도 잇따라 의결되면서 정부와 여당이 2027학년도 도입 목표에 맞춰 지역의사제를 신속히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전문과별 수요 추계·보상체계·정주여건 등 핵심 설계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가 빠르게 추진되고 있어 의료계와 지역 현장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계는 "사전 검증 없이 의사만 지역에 묶어두는 제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만큼 향후 시행령 마련 과정에서 상당한 충돌이 예상된다.
정부 "지역 필수의료 인력난에 대한 가장 직접적 해법"
이번 법안은 2027학년도 의대 신입생부터 기존 정원 안에서 일정 비율을 지역의사 전형으로 선발해 국가와 지자체가 학비·기숙사비·장학금을 전액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은 수련 기간을 포함해 최대 10년간 지역에서 의무복무를 수행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면허정지, 3회 누적 시 면허 취소까지 가능한 강도 높은 제재 규정을 포함했다.
또한 전문의가 특정 지역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도록 하는 '계약형 지역의사제'도 함께 포함되며, 필수의료 분야뿐 아니라 전문의 인력 배치에도 영향을 미치는 제도로 범위가 확대됐다.
정부는 '지역의사제'를 지역 필수의료 인력난 해결을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으로 보고 있다. 산부인과·응급의학과·소아청소년과·외과 등 필수과를 중심으로 농어촌·지방 의료기관의 인력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자율 배치만으로는 구조적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복지부는 "지역의사제를 통해 매년 일정 규모의 인력이 6~10년간 지역에 고정 배치되면 예측 가능한 장기 인력 공급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고 설명하며 지역의사지원센터 설립·적응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지역 병원의 수련·진료 환경을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응급·심뇌혈관·분만 등 의료취약 분야에서 지역 환자의 접근성 개선도 기대하고 있다.
전문과별 수요·보상체계·전달체계 모두 미완성
다만 정부의 기대효과와 달리 현 단계에서 지역의사제가 실효성 있게 작동할지는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의료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설계가 빠졌다는 것이다.
정부는 필수과·지역별 중장기 수요 분석, 인력 재배치 필요량 등 핵심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원 내 선발 → 의무복무 배치"라는 구조를 먼저 확정했다.
이에 의료계 관계자들은 "필수과 인력 부족의 본질이 고위험·저수가·배상보험 부담이라는 구조적 요인"임을 강조하며 "단순 공급 확대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비판한다.
특히 지방의료원과 지역 중소병원 다수가 만성 적자 구조에 놓여 있으며, 지역 가산수가·당직수가·필수과 위험보상 등 근무환경을 좌우할 보상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의료계에서 "병원 재정 기반이 개선되지 않으면 의사만 배치하는 정책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지역 중소병원은 경증·중증을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전달체계가 사실상 무너져 있어 환자들이 지역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대형병원으로 쏠리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며 "이 상황에서 인력만 충원하면 '의사는 있으나 환자는 없는 병원'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꼬집었다.
한편 법안에는 정주·적응 프로그램 지원 방향이 포함돼 있지만, 주거·교육·근무환경 개선 등 실질적이고 재정이 수반된 대책은 부족한 상태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는 향후 지역의사 1·2기 배치 이후 복무 종료 즉시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2009년 지역의사제(지역정원·地域枠)를 도입했으나 초기에 보상체계와 근무환경 개선이 뒷받침되지 않아 첫 5년 동안 전체 대상자의 약 17~22%가 의무복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탈했다. 복무 종료 후 2년 내 대도시로 재이동한 비율은 35~40%까지 증가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러한 실패 경험 이후 일본 정부는 뒤늦게 지역 보상 확대, 정주지원금, 근무환경 개선 패키지를 도입하며 제도를 전면 보완한 바 있다.
지역 필수의료 정상화 효과는 지역수가 개편, 필수과 리스크 보상, 지방의료원 기능 재편, 응급·분만 인프라 강화 등이 병행될 때만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현재 구조만으로는 정책 효과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정부가 2027학년도 적용 시점을 유지하고 있어 본회의 통과 가능성은 높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실제 제도는 앞으로 마련될 시행령·시행규칙에서 복무기관 지정 기준, 지역 배치 방식, 세부 지원·보상 구조, 제재 절차 등 보상·배치 기준이 제도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전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