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출범을 예고한 국민 참여 의료혁신위원회는 단순한 협의체를 넘어 '시민패널 제도'라는 새로운 장치를 품고 있다.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국민이 학습·토론을 거쳐 정책 권고안을 제시하고 정부와 전문가가 이를 공식 의제로 논의하는 구조다.
의료정책에서 숙의 민주주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은 전례 없는 실험이다. 그간 의료개혁은 주로 공급자·정부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국민은 수동적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 제도는 '국민이 직접 의료개혁의 주체로 서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민패널, 왜 지금 등장했나
이재명 정부는 장기간 이어졌던 의정갈등, 전공의 공백으로 인한 국민들의 상실감 회복과 필수의료 위기 해결을 위한 개혁 카드로 '시민패널' 제도를 꺼냈다. 특히 소아.분만.응급실 거부, 지방 의료공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언급된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그동안 의료개혁은 한계와 불신이 있었다"면서 "국민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강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의려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위원회 산하에 '의료혁신 시민패널'을 설치해 대국민 설문과 참여 의향 확인을 거쳐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을 연령.성별.지역.직업 등을 고려해 대표성 있게 구성한다는 방침이다.
운영 절차는 ① 혁신위가 공론화 과제를 의뢰 ② 운영위가 계획을 수립 ③ 무작위 추출·보완으로 시민패널 구성 ④ 학습·숙의 과정을 거쳐 ⑤ 권고안을 마련하고 공개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권고안을 정책화 여부와 함께 국민하게 공개하며 채택하지 않을 경우 사유까지 밝히는 과정을 통해 제도의 투명성을 담보했다.
해외 공론화 모델, 어떻게 진행됐나
비슷한 시도는 해외에서 이미 진행됐다. 프랑스의 경우 '기후시민회의'는 2019년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150명의 시민이 기후위기 대응정책을 직접 논의하고 권고안을 의회와 정부에 제출했다. 시민 150명은 9개월간 숙의해 149개 권고안을 마련했지만 실제 입법화된 것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고속도로 제한속도 하향, 배당세 인상, 헌법 환경조항 신설 등 주요 권고는 정치·경제권 반발로 좌절됐고 시민들은 정부 신뢰도에 10점 만점에 3.3점, 기후목표 달성 전망에 2.5점을 매기는 등 낮은 평가를 내렸다. 정책 아이디어 생산은 성공했지만 실행력 부족으로 시민 신뢰가 약화된 사례로 평가된다.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정반대의 결과를 남겼다. 무작위 시민 99명이 동성결혼·낙태 합법화 같은 사회적 갈등 현안을 숙의했고 그 결과는 국민투표와 입법으로 이어졌다.
2015년 동성결혼은 찬성 62.1%로 통과됐고, 2018년 낙태 허용도 국민투표에서 승인됐다. 언론 생중계·전문가 강연 등 투명성을 확보해 오히려 신뢰를 강화한 사례로 꼽힌다. 이는 '숙의→국민투표→입법화'라는 경로가 뚜렷했기에 합의와 제도 변화를 동시에 이끌어낸 것으로 분석됐다.
한편 국내에서도 2024년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가 운영됐다. 500명의 시민이 장기간 숙의를 거쳐 대안을 제시했지만 복잡한 재정·소득대체율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고, 노조·청년·여성 등 이해집단의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정부·국회는 권고안을 참고자료 수준으로만 활용했고 실질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보 제공 부족, 대표성 한계, 정책화 연결고리 부재가 실패 요인으로 꼽혔다.
시민 패널, 의료혁신을 위한 성공 과제는
보건의료 분야는 의료인·정부·산업계·환자가 얽힌 만큼 휠씬 더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 성공 여부가 더욱 불투명하다. 물론 시민패널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지역 갈등과 정치 불신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국민 체감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급자 중심 개혁의 한계를 일부 극복 가능하다. 소아·분만·취약지 의료공백, 응급실 수용 문제 등 현장 밀착형 과제를 국민 눈높이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점과 전 과정이 온라인 중계·속기록 공개를 통해 국민에게 바로 전달되면 투명성도 강화된다.
다만 대표성 문제, 실행력 한계, 직역 갈등 등 넘어야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우선 무작위 추첨 패널이 실제 의료 현장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첫 번째 해결 과제이다. 또 권고안이 단순 자문에 그치지 않고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치 마련도 필요하다.
실제 의료계에서는 "복잡한 의학적 사안이나 진료체계 개편 문제는 전문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시민패널이 충분히 숙지할 수 있을 지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일각에서는 "권고안이 정책화 단계에서 왜곡되거나 선택적으로 반영될 경우 오히려 불신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불어 의료계·정부·시민 권고 사이 충돌 시 조정 메커니즘이 없다면 또 다른 갈등의 장이 될 수 있는 점도 정부가 고민해야 될 부분이다. 한 의료단체 관계자는 "현재도 의사, 간호사, 한의사, 약사 등 직역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시민 권고안이 직역 이해와 정반대일 경우 이를 조정할 장치가 없다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은경 장관은 이번 제도를 두고 "국민이 만드는 진짜 의료개혁"이라고 표현했다. 의료혁신 시민패널이 '국민이 참여했다'는 상징성만 남기고 제도적 실험이 실패로 귀결될지, 현장의 의료공백 해소와 제도 개혁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새로운 신뢰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지 제도 실행 과정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