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나이에 직접 참여한 조국의 독립운동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 폭격을 감행하자 미국의 본격적인 전쟁 참여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국내 경영을 잠시 동생에게 맡기고 남가주대학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유일한은 미육군전략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그 시기 한국독립지도자들은 '전쟁은 일본의 패망을 가져올 것이고, 우리나라는 독립을 되찾을 것이니 우리도 직접 전쟁에 가담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 일환으로 미국에 있는 민족지도자들도 청년들을 모아 무장한 맹호군을 창설하고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로 한다. 이 맹호군 창설에는 독립운동가 김호 선생과 유일한이 주역이 되어 조직 및 재정을 담당하였다.

그때 유일한의 나이는 50세로 유한양행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이며, 아내와 두 자녀가 있는 가장이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중년의 유일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비록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8월 15일 해방을 맞아 냅코작전은 불발되었지만 유일한과 작전에 참여한 이들의 자주 독립의 노력은 기록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국내외 정세를 살피던 유일한은 1946년 다시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한다.
이 시기 뜻하지 않았던 대한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유일한은 독립한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또한 그에게 초대 상공장관이 되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이 있었지만 정치나 행정의 일보다도 기업을 일으키고 키우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던 그는 이를 거절한다.
전화를 딛고 일어선 유한양행

전쟁 초기에 유한양행은 시설, 자재 등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1.4 후퇴 때 서울을 포기하고 피난지인 부산에 사무실을 마련해 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다. 부산피난지 시절의 유한양행은 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특히 유엔군을 통해 들어오는 질 좋고 값싼 의약품들과의 직접적인 경쟁과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수급이 매우 어려웠다.
시설이 열악하고 약품원료도 충분치 못한 국내 제약회사들은 이에 맞서 나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한양행이 개발 제조한 것이 간유(肝油)에서 비타민을 추출하여 정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국산 원료로 새로운 약품 개발에 성공한 유한양행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돌아온 유한양행은 유일한의 진두지휘하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간 준비했던 새로운 계획들도 착착 진행해 나갔다.
사세의 확장과 제약업계 최초의 주식상장

유일한은 1962년 사옥 이전과 더불어 기업을 공개하면서 유한양행의 주식을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국내 제약업계에서는 처음 시도된 일이다.
하지만 발행 당시의 주가로 상장하면 주주들의 손실이 크다는 임직원들의 반대도 매우 컸다. 유일한은 항상 기업은 자기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를 이롭게 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될 수 있는 한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기업의 임무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주식 상장으로 인해 임직원들이 기업을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더불어 유일한은 사원지주제를 도입하여 유한양행에서 발행하는 신주를 사원들에게 분배하여 기업성공의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이는 회사의 종업원들이 회사와 함께하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