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에 봉사하기 위해 영구귀국을 결심
유일한은 1925년 라초이 식품회사의 사업 용무로 중국과 동남아를 방문한 뒤 고국에 잠시 머물렀다.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식민지 지배 하의 민족의 실정을 보고 유일한은 조국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러한 실정을 보고 유일한은 그 실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앞으로 귀국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미국에 돌아간 유일한은 자신의 조력자인 서재필 박사 및 지인들과 조국의 현실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함께 했고 영구적으로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굳게 다짐한다.
그 후 유일한은 우선 국제무역회사인 류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한국과 물자교역의 길을 터 놓았고 미국에서 설립한 라초이 식품회사의 정리를 착수했다.
당시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었던 알짜배기 회사를 동업자인 스미스에게 넘긴 유일한은 민족을 위한 새로운 기업을 창립하기로 결심하고 미시간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던 중국계 호미리와 결혼을 서두르게 된다. 1925년 결혼한 유일한은 이듬해 부인과 함께 미국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하게 된다.
고국에 돌아와 기업을 설립하다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이나 그보다는 자기의 성격과 능력에 맞는 기업인으로서 민족에 봉사하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기에 유일한은 정중히 거절하고 기업설립에 주력했다.
유일한은 우선 약 종류를 주종으로 하는 무역회사를 설립할 목적으로 라초이식품회사의 지분을 정리하고 받은 25만 달러로 의약품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는 그 해 12월 10일에 유한양행을 창립하게 된다. 초창기 유한양행의 사옥은 종로에 있는 덕원빌딩에 있었다.
초대 사장직을 유일한 자신이 직접 맡고 경리책임은 예동식, 영업담당 지배인은 전항섭에게 맡겼다. 초기 유한양행은 약품을 주종으로 하는 무역회사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당초부터 국민보건을 목적하고 설립된 것이니 약품 이외의 각종 위생용품도 수입 판매했다.

창립 4~5년이 지난 유한양행은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고 미국의 애보트 社등 저명한 제약회사와 파트너쉽을 맺었고 프랑스, 영국, 독일의 제약회사들과도 활발한 거래를 했다.
또한 매출이 성장함에 따라 유한양행은 사옥을 종로에서 서대문구 신문로로 확장 이전했다. 이 시기 유한양행은 만주의 대련에 창고를 건립하면서 남만주 및 중국 본토에까지 대리점을 둘 정도로 사세가 확장되었다. 이렇게 크게 성장한 유한양행은 1936년 6월 주식회사로 발전하게 된다.의약품 생산과 연구를 위한 소사공장 건설
유일한의 꿈은 단순한 매출 성장이 아니라 국내에서 우수한 약품을 제조하여 해외로 수출하는 것이였다. 이에 필수적은 제약 공장의 건설을 위해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에 대지 2만여 평을 매입하고 약품제조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바로 유한양행의 최초의 생산시설인 소사공장이다.

이렇게 유한양행의 소사공장에서는 수입약품에 못지않은 우수한 품질의 의약품을 생산해 냄으로써 그 시절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제약회사와 경쟁하기에 충분한 자신감을 얻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