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문화를 동경한 아버지에 의해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유일한은 1895년 1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柳基淵)과 어머니 김기복(金基福)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기연은 여러 지방도시를 대상으로 상업을 하면서 생활해 온 상인이었다.
경북 예천 출신인 유기연은 평양에 정착하면서 농산물, 건어물상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서구로부터의 수입상품을 취급하는 잡화상을 운영했다.
이 당시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에서 파견한 홀(William James Hall)이 평양에서 의료선교 사업을 하자, 유기연은 이에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를 통한 서양 문물에 대한 감화가 유기연으로 하여금 조국의 현실과 개화사상에 눈뜨게 했다. 그는 자신의 장남 일한을 민족주의자들의 강연회에 데리고 가서 아들에게도 조국의 현실에 대해 깨닫게 했다.
유기연은 다음 세대인 자식만은 미국에 보내어 선진문화를 배워 오게 해야 한다고 굳고 믿고 있었다.
결국 유기연은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홉 살 어린 나이의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고학으로 자립심을 키우다.
이렇게 유일한은 순회공사 박장현과 그의 조카 박용만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6년간 초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네브라스카 주 커니의 두 자매만이 살고 있는 침례교 신자의 집에 맡겨졌다.
당시 무일푼으로 고국을 떠나온 유일한은 근면성실한 두 자매의 보살핌으로 학업을 계속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늘 찾아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생활신조였기에 그는 틈만 있으면 두 자매의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일한은 근로의 습성을 키워 나갔다.
16세가 되던 해 유일한은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자립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신문판매,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등을 닥치는 대로 했던 유일한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학교에서 미식축구선수로 장학금도 받게 된다.

미시간대학에 입학한 유일한은 그 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중국계 호미리(胡美利)와 만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상학을 전공하면서 자본주의 이론을 배웠고 대학졸업 후에는 한동안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회계업무를 맡아 실무를 배웠다.
상인기질을 발휘하여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
그러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 시작은 숙주나물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많은 중국요리점이 있었고 중국만두는 반드시 숙주나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인들도 중국만두를 좋아해 수요가 많았지만 숙주나물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유통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유일한은 여기에 착안해 숙주나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열처리법을 개발하면서부터 사업은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다.
숙주나물 제품의 수요가 늘자 그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대학 동창인 월레스 스미스와 동업을 하여 1922년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라초이(La Choy Co)’ 식품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때 유일한의 나이 27세가 되던 해이다. 라초이는 날로 번창했고 생산하는 제품은 디트로이트, 시카고뿐 아니라 뉴욕에까지 공급됐다.
한인자유대회 참가로 생겨난 애국애족의 마음
유일한이 조국이나 민족을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세계정세에 대해 눈이 트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19년 일제의 억압에 항거하여 일어난 3.1운동은 모든 민족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깃발을 들고 일어난 큰 전환점이었다. 1919년 4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도 그 영향으로 개최된 집회였다.
유일한은 이 대회에서 결의문 작성에 참여했고 이 결의문을 직접 선포하는 일을 맡았다. 어릴 때부터 고학으로 생계와 학업을 이어야 했던 그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이 대회 참가 후 조국과 민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서재필 박사와 같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도자들과의 만남은 유일한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언가 보답할 때라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