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과 위기 그리고 새로운 출발

강중희 회장은 영도에 방 2칸을 얻어 정착하면서 재건을 위한 방도를 모색했다. 당시 부산에서는 밀수약품과 군수물자가 범람하고 있어서 소매라도 동업을 해보자는 제의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약공장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거절했다. 시설도구 하나조차 없는 상황에서 제약의 꿈을 가진 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강중희 회장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조력자를 만나 중앙동에 있는 20평 남짓한 창고를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원료와 생산기구를 구입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부산 영도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 가면서도 두 달 동안 매일 끈질기게 은행을 찾아 다니며 지점장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어렵게 자금을 지원받아 20평 남짓한 공장에서 생산을 재개해 2년 만에 생산과 판매뿐만 아니라 직원 수 에서도 1949년의 규모를 회복했다.
피난을 가서도 국민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그의 굳은 신념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피난시절의 재기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53년 봄 중앙동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공장이 완전히 소실 돼 모든 시설과 제품이 하루 아침에 눈앞에서 잿더미로 변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1951년 피난길에 올랐던 강중희 회장은 4년 6개월 만에 서울로 복귀했지만 다시 찾은 서울 중학동 본사에는 시설과 원재는 물론 가재도구 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6∙25 전쟁은 약업계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것을 잃게 된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피난지에서의 약업활동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자본을 모은 약업인이 많아 수복 후 재건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국제시장에서 밀수품들을 다루면서 무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약업인들이 완제의약품의 수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강중희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사업구조를 다각화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신약생산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항생제 기계 도입을 위해 강중희 회장은 장남인 現 동아쏘시오그룹 강신호 회장을 독일로 보냈다. 독일에서 강신호 회장이 여러 기계를 비교, 검토, 엄선하여 도입한 항생제 기계는 약업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마침내1959년부터 ‘오일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이 용두동 항생제 공장의 첫 제품으로 생산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강중희 회장은 1932년 창업 이후부터 항생제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50년대 말까지 집념과 직접 두발로 뛰어다니며 시장을 분석하고 대중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제품화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동아제약의 기틀을 마련했고 80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의 의지와 집념은 동아제약의 근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