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의약품도매상으로의 성장과 제약으로의 전환

판매망의 성공적인 확대는 ‘강중희 상점’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양약을 생산하던 국내 제약회사들이 거래를 제의해 왔을 뿐 아니라 일본의 제약회사들도 본격적으로 거래할 의사를 전해오는 등 종합 의약품 도매상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936년 후반부터는 판매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고 1940년경 지방판매팀은 경원선팀, 경의선팀, 경부선팀, 호남선팀으로 세분화되었다.
이후에도 지방판매는 계속 확장되어 신의주, 회령뿐 아니라 만주, 봉천까지도 신규거래처로 확보되면서 하루 평균 매출 5,000원을 기록했는데 당시 최고의 매출을 올렸던 약방의 하루 평균 매출이 23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수치였다. 비로소 ‘강중희 상점’은 명실상부한 판매량 1위 도매상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도매업으로 크게 성공한 ‘강중희 상점’은 위생재료를 직접 생산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국내에는 위생재료 제조업체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중희 회장은 위생재료 제조보다 매약(賣藥)류 생산을 선택했다. 그가 창업하기 전에 몸 담았던 제약회사에서 매약의 생산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매약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은 것이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1942년에 의약품 제조업 허가와 품목허가를 승인 받아 감기약, 소아용약, 정장제, 소화제, 피부질환 약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강중희 회장이 창업 한지 불과 10년 만의 쾌거였다.
1944년 일제는 전시체제의 의약품 공급을 배급방식으로 통제하기 위해 조선의약품주식회사를 새로 발족시켰다. ‘강중희상점’도 물자부족과 통제의 이중고 속에서 단순한 배급처로 전락했다. 하지만 강중희 회장은 일제시대라는 혼란의 격동기 속에서도 1945년 5월에 주식회사 설립의 청사진을 준비했고 설립은 조국의 광복이 후에 실현됐다.8∙15 광복 직후 강중희 회장은 제일 먼저 ‘강중희 상점’의 간판을 떼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동아약품공사(東亞藥品公司)’라는 간판을 달았다. 당시 ‘동아’라는 개념은 원래 의미인 동아시아에서 확장되어 천하를 일컫는 의미로 통했기 때문에 세계로 뻗어나가자는 뜻에서 기업 명칭을 선정한 것이다.
그만큼 ‘동아’라는 상호는 그의 꿈과 미래를 상징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동아약품공사’로 전환 후 막대한 양의 재고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판매를 전개할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 38선이 그어지고 미군의 신약이 유통되면서 기존의 매약류가 구시대의 유물로 인식되었고 가치가 형편없이 하락했다.

이러한 의약품 유동구조의 변화로 인해 도매상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동아약품공사’는 도매상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납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매상의 한계를 뛰어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중희 회장은 도매업의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하고 도매업을 탈피해 제약업으로 업종을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