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필의 비단이 전부인 여비를 가진 청년 강중희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백방으로 일자리를 찾았다. 이 때 운명적으로 그의 눈에 한 장의 벽보가 들어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약회사에서 외무판매원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중희상점(姜重熙商店)’의 창업

그는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열심히 일했다. 주문과 배달, 수금을 통해 기초적인 판매술을 익혔고 틈나는 대로 소분작업과 포장을 도왔다. 묵묵히 일에 열중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제약회사의 운영을 파악해 나갔다.
그러던 중 사소한 잘못으로 근무하던 회사가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사세가 기울어져 더 이상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회사의 경영을 총괄했던 일본인 미야베의 제의로 의기투합하여 서울 중학동에 ‘미야베 약방’을 공동으로 창업했다.
청년 강중희는 외무판매원 시절에 닦아 놓은 판매기반을 활용하여 하루가 다르게 매출을 높여나갔다. 을지로와 종로의 약국, 약방을 빼놓지 않고 방문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거래선은 늘어갔고 장부에 기재되는 숫자도 점차 커져갔다. 하지만 창업8개월 만에 기자의 꿈을 가지고 있던 미야베가 신문사에 입사하면서 홀로 남겨진 강중희는 독립하기로 결심을 하고 간판을 ‘강중희 상점’으로 바꿔 달았다.
바로 이날이 동아제약의 창립기념일이 된 1932년 12월 1일이었다.
강중희 상점의 판매방식은 새벽부터 소매업소를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오후에 배달을 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가 워낙 부지런하고 의욕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강중희상점’의 출범은 순조로웠다. 또 외무판매원 시절의 경험과 ‘미야베 약방’ 시절에 확보해 두었던 거래처로 인해 판매의 물꼬를 비교적 쉽게 틀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이름을 내건 상호뿐만 아니라 조선인 경영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인 거래처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경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당시 약업계는 일본의 5대 도매상이 도매를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의 제약사와 대리점 계약을 맺어 자신들의 이권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당시 서울에는 소규모 약방 등이 도매업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일본인 도매상들은 조선인 도매상이 일본에서 제조된 양약의 판매를 제지(制止)하였기에 조선인 도매상은 국내 제약회사에서 생산된 약을 판매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한국인이 시장을 파고들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다.
강중희 회장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위생재료부문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항상 그의 머릿속에는 기존 도매상들이 취급하지 않는 시장성 있는 품목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으로 가득 차있었다. 취급품목을 물색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품목부터 찾았다.
그가 선택한 품목은 고약, 알코올, 휘발유, 빙초산, 얼음베개, 얼음주머니, 파리채, 끈끈이 파리약, 화장비누, 마스크 등 일상용품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소분하는 형태로 취급하던 위생재료를 재포장하여 상품의 가치를 높이고 고품질의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