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설계자에 머물렀던 예방의학이 임상 현장으로 이동한다. 상담·다학제·인구집단 관리 등 표준업무와 수가모델을 전면에 내세운 대한예방의학과의사회 출범은 고령화 시기에 극복해야 할 '고질적 편견'을 뒤집는 움직임이다.

지난달 출범한 대한예방의학과의사회는 한국 의료체계의 모순을 깨기 위한 시도다. 1963년 첫 예방의학 전문의가 배출된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독립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승국(홈닥터예방의학과 원장) 초대 회장은 예방의학과 전문의로서 직접 의원을 운영하며 제도의 벽을 온몸으로 경험한 인물이다. 기 회장에게 의사회 출범의 배경과 향후 계획, 그리고 예방의료의 방향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한예방의학과의사회 기승국 회장(홈닥터예방의학과 원장)이 방문진료 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한예방의학과의사회 기승국 회장(홈닥터예방의학과 원장)이 방문진료 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60년 만에 탄생한 독립 조직, 왜 지금인가

대한예방의학과의사회 창립의 가장 큰 배경은 한국 의료가 더 이상 '치료 중심'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 기 회장은 고령화로 만성질환 환자가 급증하면서 의료의 초점이 병원을 넘어 지역사회로 확장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 회장은 "커뮤니티 케어와 통합의료가 국가 정책의 주요 의제로 부상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설 수 있는 전문의가 바로 예방의학과 전문의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예방의학이 실제 의료제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예방의학이 공중보건이나 정책 영역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일차의료와 지역사회 의료 현장에서 실천하기에는 제도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정밀의료부터 만성질환 관리, 보건정책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활동해왔다.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다 보니 그 전체를 아우르는 실천적 조직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대한예방의학회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의사회를 별도로 만든 이유에 대해 그는 "학회는 예방의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세우고 정책 설계까지 큰 틀을 짜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의사회는 이러한 성과를 현장과 제도 속에서 구현하는 조직으로, 두 축이 연구·정책·실행이 선순환하는 구조를 이끌 때 비로소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방 강조 속에서도, 제도 밖에 놓인 전문의

기승국 회장은 예방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정작 예방의학 전문의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단순한 인력 문제나 인식 부족이 아닌 정책과 제도의 괴리로 진단했다.

정부는 예방 중심 의료체계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예방의학 전문의에게는 어떠한 제도적 기반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방의학과는 전문과 수가 하나도 없는 유일한 전문과목이며, 법정 서식조차 ‘예방의학과’ 항목이 빠져 있어 매번 ‘기타’로 표기해야 하는 실정이다.

그는 이러한 구조적 결함이 의료체계의 본질적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의료체계는 여전히 치료 행위에만 보상하고, 예방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비과학적 대체의학이나 상업적 건강기능식품 산업이 ‘예방’을 대신 점령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고 말했다.

기 회장은 "예방의학이 제도 속으로 들어와야 국민이 '진짜 예방의료'를 경험할 수 있다"며, 예방의학의 제도화가 단순한 직역 보호가 아니라 국민건강의 본질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예방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제도의 설계에서 시작"

기 회장은 예방의학과 의원을 운영하며 체감한 제도적 한계도 털어놨다. 예방의료의 수요는 객관적 필요는 크지만 주관적 욕구가 낮아 자연스럽게 의료 수요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방의료는 '의무 교육'처럼 제도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질병을 치료하면 의료행위가 되지만, 예방하면 행정이 되는 구조다. 건강검진 외 대부분의 예방의학적 행위가 기본진찰료로만 보상받는 현실에서 예방의학 전문성이 발휘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산업보건 영역에서도 예방의학 전문의의 역할은 법령상 배제돼 있다며 "예방의학 전문의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업보건의 자격을 갖고 있음에도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상 총괄책임자 자격에서 제외돼 있다"고 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혈당 500 넘는 20대 청년, 예방의료가 삶을 바꿨다

기 회장이 예방의학의 필요성을 가장 절실히 느낀 순간은 산업보건 현장에서였다. 혈당이 500mg/dL을 넘는 20대 청년 노동자를 만나 즉시 업무를 중단시키고, 지역 병원과 진료를 연계했던 일이다.

그는 "제도적으로 강제하지 않았다면 이 청년을 만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며 "그대로 방치됐다면 몇 년 안에 투석이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투석 환자 한 명의 연간 진료비가 3천만 원을 넘는다. 예방의료 한 건으로 건강보험 재정 수억 원을 절감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의료가 한 청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끊어진 예방의 연속체, 현장에서 다시 잇는다

대한예방의학과의사회가 내세운 가장 큰 목표는 '예방의 연속체'의 복원이다. 현재 산업보건·공공보건·임상예방의학이 각각 다른 제도에 속해 단절돼 있는데, 의사회는 이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인구집단 수준의 역학적 분석 능력과 개인 단위의 임상 판단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 공중보건과 임상, 행정과 현장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며 "공중보건에서 개인 의료로 이어지는 연속체를 복원하고, 예방의학과 전문의가 다학제 팀을 이끌며 통합의료를 설계하는 체계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예방의학 제도화…법과 제도 속 작은 변화부터

의사회는 창립 직후부터 '임상예방의학 표준업무 및 수가모델 개발'을 중점 과제로 삼았다. 기 회장은 이 과제가 단순한 수가 신설이 아니라 "예방의학의 제도화 설계도"라고 설명했다.

기 회장은 "상담 수가, 다학제팀 수가, 인구집단관리 수가 등 구체적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의료법상 '의료행위 장소 제한' 완화, 다학제 협력 수가 제도, 데이터 기반 건강관리체계 등 세 가지 제도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어 "예방의료가 병원 밖 지역사회와 산업현장에서도 실천될 수 있도록 제도적 문턱을 낮추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근거 중심 예방의료를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그는 강조했다.

기 회장은 예방의학의 제도화를 위한 정책 협의 창구를 복지부와 국회 등과 본격적으로 열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큰 변화보다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겠다. 오늘도 장기요양 의사소견서를 작성했는데, 전문과목란에 '예방의학과'가 없다. 매번 '기타'에 체크하고 직접 써야 한다. 이런 서식에 '예방의학과' 한 줄을 추가하는 일, 그 작은 변화가 의사회의 출발점이다."

그는 "그동안 예방의학과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해줄 조직조차 없었다"며 "이제 그 목소리를 낼 조직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덧붙였다.

"의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질병 예방에 있다"

기 회장은 예방의학과 의사의 역할을 '싱어송라이터'에 비유했다. 지금까지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주로 '송라이터'로서 의료의 큰 틀을 설계해왔지만, 작곡한 노래가 제대로 불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는 "누가 작곡의 의도에 맞춰 그 노래를 가장 잘 부를 수 있을까. 바로 작곡가 자신이다. 예방의학과 전문의가 직접 현장에 나서 자신이 설계한 정책과 의료 시스템을 실제 환자, 지역사회, 산업현장에서 구현할 때 그 완성도가 가장 높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방의학의 의미를 묻자, 그는 해리슨 내과학 교과서를 인용했다. "의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예방의학은 바로 그 '의학의 궁극적인 목표'에 맞닿아 있는 필수적인 의학"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후배 세대에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을 전했다. "지금은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대체의학, 건강보조식품 산업이 '예방'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결국 과학에 기반한 예방의학이 그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다만 그 ‘새벽’이 스스로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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