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설 연휴, 중앙응급의료센터 윤한덕 센터장의 과로사 소식은 한국 사회를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그 비극 뒤에는 한국 응급·외상체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한 리더의 집념과 이를 함께 실현하려 했던 동료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
이 기록을 현장의 숨결로 소설에 옮긴 이가 있다. 윤한덕 센터장과 ‘지역응급·외상체계 구축 범정부TF’ 거버넌스 설계에 직접 참여했던 박세정 박사다.
그는 2018년부터 윤 센터장과 함께 중앙과 지방, 의료와 소방을 연결하는 ‘지속가능한 지역완결형 거버넌스’ 구축에 매진한 인물이다. 출간을 앞두고 있는 박세정 박사를 만나 '거버넌스'(가제)에 담긴 현실과 문학 사이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화이트보드에 남은 흔적에서 시작됐다”
박세정 박사는 2018년 보건복지부, 응급의학과·외과 의사, 소방청, 지자체 등이 참여한 ‘지역외상체계 구축 시범사업’ TF 23명 중 박사급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그의 임무는 중앙과 지방, 의료와 소방을 연결하는 ‘거버넌스 파트’ 설계였다.
그러나 2019년 설 연휴, 윤한덕 센터장의 과로사 소식을 접한 그는 언론 기사 사진 속 화이트보드에서 자신이 보고했던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집필의 기폭제였다.
'거버넌스'는 중앙과 지방, 의료와 소방, 부처와 직능이 한 팀이 되어 필수 응급·외상체계 완성에 도전했던 ‘윤한덕 TF’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박 박사는 “2019년 2월, 윤한덕 센터장님의 순직 소식을 접했을 때 언론에 실린 사진 속 화이트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직접 보고했던 내용과 TF의 설계 방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며 "윤 센터장님의 뜻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집필이 시작됐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윤 센터장님의 갑작스러운 부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을 되살리고 ‘죽음을 줄이는 체계’를 현실화했는지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사실적으로 담고 싶었다”며 “윤 센터장님은 응급의료 거버넌스를 단순한 제도가 아닌 ‘약자의 생명을 지키는 약속’으로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정책입안자이자 학자로서 이 책이 누군가의 무너짐을 감지할 수 있는 작은 중심이 되길 바란다”며 '거버넌스'가 문학을 넘어 정책과 사회 토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실제 TF 기록을 소설로 옮기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중앙과 지방, 의료와 소방, 부처와 직능을 넘나든 윤한덕 TF의 기록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윤 센터장님의 부재 이후, 현장 실무자들이 어떻게 조직을 지키고 ‘죽음을 줄이는 체계’를 만들었는지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윤한덕 센터장이 한국 응급의료에 남긴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윤 센터장님은 “이 시스템엔 중심이 없다. 누가 무너져도 감지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실제로 그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응급의료 거버넌스를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약자의 생명을 지키는 약속으로 보았다.
-연구원으로 참여하며 본 응급의료정책의 한계는.
기관 간 갈등, 현장 혼란, 리더십 붕괴, 사일로(부처 장벽) 등 구조적 한계를 마주했다. 직접적인 평가는 어렵지만, 문학적 장치를 통해 이러한 책임 공백의 문제를 조명하고 싶었다.
응급의료를 ‘돈 안 되는 분야’로 보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경찰과 소방이 수익성을 따지지 않듯, 응급의료도 시장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사의 경계에 선 시민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된다.
-현 의료정책과 현장에 이 책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나.
응급의료의 현실은 분절돼 있고, 해법은 거버넌스이다. 119구급대는 행안부, 응급의료기관은 복지부 소속이어서 법과 제도가 분리돼 있다. 중앙정부·지자체, 소방·의료, 외상외과·응급의학과 간의 연결은 실무자 중심의 거버넌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이름 없이 환자를 지키는 연구자, 수십 번 “괜찮으십니까”를 되묻는 구급대원, 정책을 다듬는 공무원 모두가 국가의 안전망이다. 국민이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거버넌스’가 문학을 넘어 정책 논의와 사회적 토론을 촉진하는 매개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의 무너짐을 감지할 수 있는 작은 중심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하 박세정 박사 일문일답 전문>
-소설 ‘거버넌스’를 집필하게 된 배경과 동기는 무엇인가.
2018년 저는 윤한덕 센터장이 팀장으로 이끌던 ‘지역외상체계 구축 시범사업’ TF에 박사급 연구원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제 역할은 거버넌스 설계였고, 다양한 기관들을 연계해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2019년 설 연휴, 윤 센터장님의 과로사 소식을 접한 뒤 언론에 공개된 화이트보드 사진에서 제가 직접 기록했던 내용들을 보게 됐습니다. 그 순간부터 보고 내용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7년에 걸쳐 ‘거버넌스’ 집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TF의 기록을 소설로 옮기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거버넌스’는 중앙과 지방, 의료와 소방을 아우른 23명의 연구원과 중앙응급의료센터의 분투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기록입니다. 윤한덕 센터장의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체계를 지켜냈는지, ‘죽음을 줄이는 시스템’을 어떻게 현실화했는지를 내부자의 시선에서 그리려고 했습니다.
-작가님이 이해하는 윤한덕 센터장의 가장 큰 가치와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윤 센터장님은 생전에 “우리가 선 이 시스템에는 중심이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가 무너졌을 때 누구도 이를 감지하지 못했죠. 윤 센터장님은 응급의료 거버넌스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약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약속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남긴 체계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거버넌스’는 그 뜻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버넌스 조직도’, ‘화이트보드 도식’은 어떤 의미가 있나.
모두 실제입니다. 언론에 공개됐던 고인의 화이트보드에는 TF가 벤치마킹하던 일본의 응급의료시스템 ‘마못떼’와 국립중앙의료원 원지동 이전 계획 등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문학적 장치라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기록입니다.
-연구원으로 참여하며 느낀 응급의료정책의 한계나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기관 간 갈등, 현장의 혼란, 시스템의 무기력, 리더십의 공백, 부처 간 장벽 등 여러 모순을 마주했습니다. 저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이러한 책임 공백을 드러내고, 의료시스템 붕괴에 대한 경각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이 현 의료정책 현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길 기대하나.
‘거버넌스’는 응급의료의 현실이 ‘분절’되어 있고, 해법은 ‘거버넌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119구급대는 행안부 소속이고, 응급의료기관은 복지부 관리 하에 있습니다. 법체계도 나뉘어 있죠. 소방은 ‘의료 없는 구조’, 응급의료센터는 ‘현장 없는 의료’로 따로국밥인 겁니다. 저는 이런 분절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실무자 중심의 거버넌스에 있다고 믿습니다.
-의료계 현장 종사자와 정책 담당자들이 이 책에서 가장 집중해서 읽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응급의료 연구자들, 환자를 들것에 싣고도 수십 번 “괜찮으십니까?”라고 묻는 구급대원들, 그리고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가는 공무원 모두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분들이 가진 사명감과 자긍심이 다시금 확인되길 바랍니다.
-‘거버넌스’가 제시하는 응급의료시스템의 실질적 변화는 무엇인가.
응급의료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뒷전으로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경찰과 소방이 돈을 벌지 않는 것처럼, 응급의료도 국민 생명을 위한 사회안전망입니다. 병상 가동률과 수익성 논리에서 벗어나야 하며, 생명 앞에선 경제 논리가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메디팜스투데이 독자와 의료계 종사자, 그리고 일반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거버넌스’가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정책적 논의와 사회적 토론을 촉진하는 매개가 되길 바랍니다. 누군가의 무너짐을 감지할 수 있는 작은 중심이 되는 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박세정 박사 이력
국립중앙의료원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인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특화형 응급·외상체계 범정부TF 23인 중 박사급 연구원으로 거버넌스 설계에 참여했다.
와세다대학 정보과학과 졸업. 동대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과에서 MBA 취득 후, MIT공과대학 대학원 수료. 한국에 들어와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교보문고, 인터파크, 매일경제, 머니투데이 선정작가로 한국추리소설상, 청년문학상, 테크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한 장편추리소설 ‘비앙또 단편선(문학과평론사)’을 펴냈다. 그 외에 베스트셀러 ‘미친 꿈은 없다(쌤앤파커스)’, ‘스타트업 노트(광문각)’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