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 사장의 정도개혁으로 동화는 제2의 창업기를 마련한다. 하지만 당시 격변하는 국내외 상황 때문에 회사의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중일전쟁(1937)으로 전시체제령이 내려졌고, 통제가 심해져 국내 경제 사정 역시 어려워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탈피할 길을 찾던 중 윤 사장이 눈을 돌린 곳은 바로 국외 시장이었다. 그중 동화약품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만주’를 주목했다. 만주 지역은 지금의 중국의 요령성과 길림성, 흑룡강성 세 지역을 이르는 것이었다.

1942년 창립기념일(맨 뒷줄 우측 세번째 윤창식 사장)
1930년대 당시에는 유명무실해지기는 했지만, 원래 만주 지방은 동화의 특약점이 있어 봉천, 신경, 북간도, 안동 등의 지역에 활명수를 비롯한 인소환, 지해로 등 동화약품의 유명제품이 널리 알려졌었다. 게다가 중일전쟁으로 생산 시설이 파괴되고, 일본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커진 상태라 만주 지역의 중국인들은 일본 제품을 기피했다.윤창식 사장은 동화의 새로운 활로로 다시 한 번 만주 시장 개척을 꿈꾼다. 동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함 일이었으며, 민족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인 윤 사장에게는 만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동포에게 좋은 약을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곡 필요한 사업이었다.

본격적 만주 진출을 앞둔 1937년 7월, 동화는 ‘부채표 활명수’를 만주국 특허사무소에 특허 출원했다. 우리나라 브랜드가 해외에 공식 진출한 선구자적 사례였다. 윤창식 사장이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지목한 장소는 안동이었다. 1938년 12월, 동화약방은 안동시 금탕구에 지점을 개설한다.

새롭게 개설한 안동 지점의 지점장으로는 국내 여성 약사 1호인 장금산을 임명하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했다. 장금산 지점장은 조선약학교 졸업생으로 이화여전 영문과에 다니다 중퇴하고 약사의 길을 택한 진취적 여성이었다. 동화는 당시의 사회 통념상 낯선 일이던 여성 지점장의 해외 임명하는 진취적인 사례를 만든다.

국내 사정이 나빠지고 원료 조달 역시 어려워지자 동화는 만주 현지 생산을 계획한다. 만주 지역의 실세였던 일본 관리들의 방해가 극심했지만, 윤창식 사장은 각고의 노력 끝에 1942년 7월 활명수를 비롯한 29개 제품에 대한 제조 허가를 취득하고, 자체 공장을 갖게 된다.

안동 공장에서의 생산은 공장이 완공된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계속됐다. 전시 통제 탓에 건설이나 약품 생산 모두 어려움을 겪었으나, 생산 시설까지 건설해 상권을 본격적으로 공략했다.

얼마 안 가 일본이 패망했지만, 동화는 오히려 암흑기를 맞게 된다.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북쪽을 장악한 소련군은 남북을 오가던 기차의 운행을 중단시키며 남북 관계가 경직되자 윤창식 사장은 안동 지점을 책임지고 있던 장금산 약사와 종업원들에게 공장 설비와 재고를 포기하고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기차가 없어 걸어서 서울로 귀환해 직원 모두 무사했지만, 동화는 만주의 공장, 북한 쪽의 거래처 등을 잃게 된다. 동화의 매출 중 북쪽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광복 후 동화는 본사 공장이 건재하고, 원료 역시 확보한 상황이라 다른 제약업체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하지만 민족주의자였던 윤 사장은 나라의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업에 매달려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광복을 맞은 조국이 제 모습을 갖출 때까지 당분간 동화를 개점휴업 상태로 유지할 것을 결심한다.

사업은 휴지기를 맞았지만, 윤 사장은 종업원들에게 보수를 꼬박꼬박 지급했다. 동화는 동화 가족의 것임을 강조하며, 상생을 꿈꾸던 윤창식 사장이었기에 임직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한독립촉성회(앞줄 중앙 김구, 이승만, 오세창, 맨 뒷줄 우측 네번째 보당 윤창식 사장)
윤창식 사장은 기업 활동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큰 역할을 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직에 참여한 것이다.

윤창식 사장은 중앙상무위 위원으로 참여해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다.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나라가 살아야 기업이 살 수 있다는 큰 의지를 보여준 윤창식 사장의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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