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강 사장의 아버지인 동화약방의 창업자인 노천 민병호 선생은 74세의 고령이었고, 민강 사장의 장남은 17세에 불과했다. 이후 회사 경영을 맡았던 민강 사장의 부인, 조카 등은 경영에 문외한이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국내 경제 여건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31년 민강 사장이 동화를 주식회사 체제로 바꾸었지만, 경영이나 체계 등이 제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고, 경영 방식 역시 전근대적이었다.
대내외적인 악재로 경영 구조를 개선할 활로가 없다고 판단한 윤창식 사장은 대대적인 구조 조정에 나선다. 윤창식 사장은 현대적인 경영 기법 도입을 위해 우선 우수한 인력을 영입하고 전문 경영인 체제를 갖추었다.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한 윤창식 사장은 기업 경영에서 인재와 조직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윤창식 사장은 젊은 인재를 스카웃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하였다. 지금의 전문경영인 개념의 지배인을 영입했다. 본격적인 전문 경영인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 자체가 기업사에 기록될만한 일이었다. 이 외에 경리, 영업 등 다양한 부서의 인원을 임명하며 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좋은 약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그 대가로 회사는 경영되는 것’이라는 사명감을 강조하였다. 이 명문은 후일 윤광열 명예회장이 제정한 동화정신 1항으로 성문화되기도 했다. 회사 경영의 어려움으로 쇠퇴화된 제품 개발과 품질 관리를 위한 전문약사 초빙 역시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당시 일제가 온갖 구실을 동원하여 민족과 민족 산업을 말살하고, 식민 정책에 영합기를 강요하던 때였다. 윤창식 사장은 10배의 노력과 시간이 들더라도 정도와 원리원칙을 가질 때만 기업이 영속성을 갖는다는 신념으로 경영에 임하며, 정도개혁에 박차를 가했다.내부적으로는 동화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윤창식 사장은 동화가 동화식구의 회사임을 강조하기 위해 본인이 먼저 동화식구에게 귀감이 되고자 노력했다. 사장용의 승용차가 있었지만, 절대 개인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출퇴근은 전차를 활용했으며, 10리(3.9km) 정도의 길은 늘 걸어다녔다. 정미소를 크게 했지만, 쌀밥 대신 싸래기밥이나 핍쌀밥을 먹으며 솔선수범했다.

윤창식 사장의 개혁은 성공으로 이루어졌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회사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단시일내에 주력품활명수는 1일 판매 1만 병, 최고로 많이 팔릴 때는 1년에 500만 병까지 팔리게 되었다. 윤창식 사장의 개혁이 성공한 원인은 동화 가족뿐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우리 민족 모두가 골고루 잘되도록 돕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