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와 믿음, 그 이상의 좋은 경영전략은 없다”

80년대 초 윤용구 회장의 모습.
윤용구 회장이 대외 인터뷰나 직원들이 모인 자리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기업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이 두 가지만큼 중요한 자산은 없다고 생각했고, 비약적으로 성장한 일동제약이 이것을 그대로 증명했다.

실제로 윤 회장은 직원들의 복지에 관심이 컸다. 1969년, 수출 협의차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임원들이 일본제약기업의 우수한 근무환경에 강한 인상을 받고 윤 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띈 것이 주 5일근무제였다.

일본 업체 관계자는 일주일에 이틀을 쉰 결과 직원들의 사기와 업무 효율이 늘어 오히려 생산성이 좋아지고, 여가가 늘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시장도 활성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했고, 이를 보고받은 윤 회장은 주 5일 근무제의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국내 산업계에 에너지 위기가 불어 닥치자 일동제약은 주 5일 근무제를 단행했다. 국내 기업이 공식적으로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도 마땅한 대가 없이 특근을 시키기 일쑤였던 기업환경 속에서 일동제약의 주5일 근무제 도입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윤 회장의 아들인 윤원영 사장(현 일동제약 회장)이 이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얼핏 생각하면 하루 쉬면 쉰만큼 생산실적이 줄어들겠지만, 충분한 휴식을 통해 능률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 윤 사장은 확신했던 것이다.

주 5일 근무제 도입 이후 결근이나 지각, 이직률이 현저히 줄었고, 무엇보다 작업 손실이나 불량 발생률이 크게 감소했다. 에너지 절감 효과 역시 컸고, 직원들은 여가를 이용해 자기계발을 하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애사심도 커졌다.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였다.

일동제약의 성공적인 주 5일제 도입이 알려지자 다른 국내 업체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초까지 20여개의 업체가 주 5일 근무를 도입하게 되었다.

윤 회장은 주5일 근무제 외에도 다양한 직원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계모임이 성행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저축 교육을 실시하여 은행을 통한 재형저축으로의 전환을 장려했고, 다양한 포상제도, 구내식당 운영, 취미 동아리 지원 등 선도적인 직원 복지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특히 구내식당에서는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줄을 서서 자율 배식하고 동등한 자리에서 식사하도록 지시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들이었다.

일동제약 본사
주 5일 근무제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일동제약은 직원 복지에 힘을 쓰는 기업으로 공인을 받게 되었으며, 우수인재들의 입사지원도 늘어만 갔다. 사람이 곧 자산이라 생각해온 윤 회장은 유능한 사람을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뽑은 사람을 유능하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에 직원 장학금 제도를 마련, 대학원 진학을 지원하여 다수의 석사와 박사들을 길러냈다.

  기업공개를 단행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1975년 일동제약은 자본금 10억 원으로 주식 가족 2천 여명을 거느린 건실한 공개 기업이 되었다. 윤 회장은 깨끗한 경영을 해왔다는 자신감으로 다른 회사들에 앞서 망설임 없이 기업공개를 진행했고, 신뢰받는 기업으로서 대중에게 한 층 더 깊이 각인되게 되었다.

  윤용구 회장의 인화정신은 자연스럽게 사원들에게 전파되었다. 다양한 직원 복지 프로그램과 온화한 사업장 분위기는 ‘믿음과 인화’를 일동제약의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게 했다. 1978년 윤 회장이 원호성금으로 사재 1천만원을 기부했을 때의 일이었다.

윤 회장의 선행에 자극을 받은 일동제약 여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일일 찻집을 열었고, 60여만원의 수익금으로 휠체어 5대를 구입하여 푸짐한 선물과 함께 장애아동 보호시설에 기부했다. 이 미담이 일간신문에 비중 있게 게재되었고 건전한 노사문화가 정립되지 못했던 당시 기업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윤 회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마련된 우수한 근무환경, 유능한 인재, 신뢰받는 기업이미지는 우수한 제품력과 맞물리며 일동제약을 고도성장으로 이끌었다. 아로나민, 비오비타의 매출이 고공비행을 거듭했음은 물론, 새롭게 개발한 전문의약품들이 잇달아 성공했다.

윤 회장은 어느 한 품목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양한 품목으로 전략을 분산시켜 매출 성장과 리스크 최소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또 슬로건을 내세우기 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전략을 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기업 공개 이후에는 특히, 실적과 수치에 연연하고 기업의 비전을 과대포장하곤 했는데, 일동제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청주 원료공장을 신축하여 원료 국산화에 가속도를 냈으며 품질과 기술 수준이 현저히 높아져갔다. 영업에 있어서도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여, 당장의 실적에 매달리기 보다는 장기적인 신뢰를 줄 수 있는 영업활동을 추진했다.

거래처의 단위별 판매 외형을 늘이기 보다는 제품이 소비된 후 수요가 생기는 단계에까지 완전 판매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일동제약은 1970년대 말, 30%가 넘는 매출 성장을 거듭했고 1982년 대망의 2백억 매출 고지를 달성했다. 1961년 1천여만원의 매출을 올리던 회사가 20년만에 무려 2천배의 매출액을 올리는 대형제약사가 된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회사가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 나가자, 윤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후배들에게 위임하고 가족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윤 회장은 노년에도 늘 검소하고 근면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8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4시 30분에 기상했다. 기상 후에는 냉수마찰과 체조를 하고 북악산을 산책했다.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정확히 9시 5분 전에 회사를 출근했다가 점심식사는 12시에, 반드시 집에서 했다.

윤 회장의 자수성가 비결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 신용, 그리고 절제라고, 약업계 인사들은 말하곤 했다. 이윤을 위해 보건을 해하는 일은 결코 없었고, 한 번 한 약속은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지켰다.

또 늘 검소하게 생활하고 허세나 권위주의를 경계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내부적으로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직원들을 조화시켰고, 외부적으로는 신뢰받는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주었으며, 그 결과가 회사의 성장으로 돌아왔다.1991년 일동제약은 어느새 창립 50주년을 맞으며 명실상부한 중견기업이 되었고, 야심차게 제2창업을 선언했다. 1992년 양재동으로 사옥을 신축 이전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9월, 윤용구 회장은 자택에서 조용히 영면을 맞았다. 향년 86세였다.

윤 회장의 장례는 양재동 본사에서, 유족들은 물론 각계 인사들과 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큰 슬픔 속에 거행되었다. 약업계에 종사한지 60여년, 그리고 일동제약을 세운지 52년, 윤 회장은 일동제약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약업계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2월, 사회환원과 인재양성이라는 윤 회장의 유지에 따라 유족들은 송파재단을 설립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한 장학사업을 펼치며 윤 회장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인화와 믿음’이라는 윤 회장의 제1의 철학은 그가 떠난 후에도 일동제약의 위대한 자산으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 일동제약은 72년 역사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제약기업으로 우뚝 서있고, “우리의 의약품은 우리의 기술로 만들자”며 일동제약을 설립한 젊은 송파의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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