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은 과감한 광고전략을 부추기게 되었다. 활성비타민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약사들이 주로 사용했던 신문이나 잡지 광고 전략을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광고를 고민했고, 그때 고안해 낸 것이 스포츠를 활용한 마케팅이었다.
윤 회장은 김기수 선수가 세계 주니어 미들급 선수권전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MBC 라디오와 단독중계권을 획득한 뒤 아로나민 광고의 라운드 보드를 방송 카메라에 잡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중량급 세계 타이틀 매치여서 입장료도 스폰서비용도 상당한 수준이었기에, 당시 윤 회장의 선택은 모험이었다.
김 선수에 대한 믿음은 강했지만 과감한 투자로 인해 경기결과에 회사의 운명이 달려있는 상황이었고, 윤 회장도 훗날 ‘가장 초조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드디어 경기 시작, 15회전까지 숨막히는 경기가 지속되었고, 결과는 승리였다.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김 선수의 활짝 웃는 얼굴과 함께 “승리! 아로나민 효과”라는 카피의 광고가 실렸고, 경기 결과에 열광하던 국민들의 뇌리에도 아로나민이 박힐 수 있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아로나민의 슬로건도 이때 탄생한 것이었으며, 김기수 선수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은 아로나민의 고공비행에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1966년의 일이었다.
윤 회장은 국민들의 스포츠 열기를 고취시키는 데에 기업들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믿었고, 아로나민 마케팅의 성공은 그러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는 제약업계의 사명이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데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스포츠 또한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건전한 활동이기에, 스포츠 저변 확대를 위한 기업인의 임무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일동제약은 MBC ‘일동스포츠’라는 중계프로그램을 단독 스폰서하며 스포츠의 저변확대와 일동제약 CI 정립을 동반 실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케팅 활동은 국내 스포츠 마케팅의 효시로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아로나민의 히트로 일동제약 역시 유명제약사가 되었고, 이스트제제에 밀려 고전하던 비오비타도 동반성장하기 시작했다. 비오비타 역시 육아 건강 시리즈의 공익성 광고와 동양베이비콘테스트 개최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활동으로 시장공략을 지속했다.
이후 아로나민은 꾸준한 품질개선과 함께 독창적인 광고활동을 지속했다. 70년대 초 진행된 아로나민의 ‘의지의 한국인’ 캠페인은 사회의 곳곳에서 묵묵히 임무를 다하는 숨은 일꾼들을 소개하며 국민들을 응원하는 공익성을 담았다. 국내 캠페인광고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 이 시리즈 광고는 당시 보건사회부장관으로부터 건전광고 관련 표창을 받기도 했고, 해외 광고제에서 입상하기도 했으며, 육영수 여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칭찬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윤 회장은 아로나민의 성공을 발매시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우수한 품질, 과감한 광고, 치밀한 영업전략이 조화되며 윤 회장의 기대는 적중했고, 덕분에 비오비타의 동반성장과 일동제약의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하루 하루 달라지는 일동제약의 명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윤 회장은 아로나민과 비오비타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196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메타돈 사건으로 다수의 업체들이 폐쇄 조치되거나 검찰에 고발되기도 했고, 함량미달의 가짜 항생제 파동이 연달아 일어나며 국산 의약품의 불신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윤 회장은 일동제약은 정직하게 더 좋은 약을 만드는데 열중하자고 직원들을 다독였고 한편으로는 제약 기술을 한 단계 더 혁신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미국 와이어스사와의 기술 제휴는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970년, 일동제약이 와이어스사와 제휴를 맺기까지는 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제휴회사로부터 원료를 들이지 않고 국내에서 조달하겠다는 윤 회장의 고집 덕분이었다. 이는 당시 다른 메이커들과는 다른 양상의 제휴였다.
그는 완제품을 들여와 판매만 하는 편한 방식 보다는 기술을 공급받아 해당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첫 작품이 ‘파란병의 하얀 위장약’으로 유명한 암포젤엠이다. 알루미늄으로부터 원료를 합성하는 기술과 합성된 원료를 겔형으로 제제하는 방법 등, 당시로써는 매우 까다로운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의 힘으로 완제품을 완성시켰다.
일동이 기초원료의 합성에서 외화를 절약하고 생산원가를 최대한 줄여 외국제품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제품을 내놓았다는 점은 대외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았다. 일동제약은 1973년부터 암포젤엠을 비롯하여, 오부라0.25, 옥사인엠 등을 생산해내며 명실공히 치료제 전문 메이커로 한 걸음 더 올라섰다.시설투자도 확대했다.
새로운 치료제 라인업에 맞추어 설계된 최신 설비의 도봉공장을 완공, 유산균 배양시설을 확장하고 무균 자동화시스템을 완비했다. 원료국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한 청주공장 착공을 준비한 것도 이 시기였다. 청주 원료공장이 완공되면 광범위 최신 항생물질과 궤양치료제 원료들을 국산화함은 물론, 국내 제약사들이 당시 고질적으로 겪고 있던 원료난도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해 나가던 일동제약은 1973년, 10년전 아로나민이 막 발매되던 1963년과 비교하여 생산액이 60배나 성장하며 제약업계의 상위 랭킹을 점하게 되었고, 직원수도 300명을 훌쩍 넘겼다.
일동제약의 회사분위기는 매우 온화했다. 누구를 채용하던 간에 윤회장은 경영자의 직분으로 강요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반드시 관계자들과 의논한 끝에 채용을 결정했다. 사원들에게는 스스로 일을 찾아 능력을 펴나가기를 바랐다. 간섭보다는 자율에 맡겼다. 회사 내에서도 대표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