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기쁨도 잠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분단이 재촉되어 가며 혼란하고 불안한 사회분위기가 계속됐다. 당시 미국의 최신의약품들이 국내로 빠르게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원료 구입이 어려워져 국내 제약사들은 큰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당장 직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의약품 외에도 생활필수품을 생산해서 판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만들었던 것이 비둘기 그림이 새겨진 비누였다. 이 비둘기는 불안했던 당시 사회상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이때 비둘기 상표가 훗날 일동제약 이미지에 사용되었다.
생활용품 판매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자, 일동제약은 신설동으로 사옥을 이전하고 비누의 생산을 중단한 뒤 다시금 제약에 몰두했다. 기침약, 소화제 등이 적지 않은 판매를 올리며 일동제약의 경영은 다시 정상화됐다.
그러나 1950년 여름, 결국 전쟁이 시작되고 일동제약 신설동 사옥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윤 회장은 피난을 떠나 약국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후 다시 찾은 신설동 사옥과 안암동 자택이 큰 피해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피난시절 운영하던 약국이 잘 된 덕으로 인해 사업자금도 넉넉히 마련하게 됐다.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윤 회장은 다시금 일동제약의 재기를 위해 힘쓰게 된다.
1953년 성균관대학교에 약학과가 신설된 이래, 휴전 이후 다수의 대학들이 약학부를 신설했고 그해 말에는 약사법이 신설 되는 등 전쟁 후 약업계는 빠르게 질서를 잡아갔다. 일동제약도 정상화를 서둘렀다. 아직 주문량이 많지 않았기에 신설동의 기계를 돌리지 않고 윤 회장의 자택에서 생산하는 수준이었지만, 직원도 다시 늘어가고 매출도 안정화되기 시작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윤 회장은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기존의 의약품만으로는 회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남들이 만들지 못한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해야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새로운 약의 개발, 원료약품의 국산화는 윤 회장이 일찍이 제약회사를 세우는 계기이기도 했기에 오랜 구상을 실행으로 옮겨야 할 때라는 생각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제품은 바로 유산균제였다. 유산균의 배양은 소자본으로 가능하나 기술과 시설의 뒷받침이 없어 국내에서는 유산균 원료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배양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시설이나 환경이 열악하여 쉽게 사멸되곤했다.

여기에 칼슘, 비타민B군 등을 혼합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비오비타였다. 1959년 8월의 일이었다. 비오비타는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된 최초의 유산균제로 기록되어 있다.
비오비타는 활성유산균과 낙산균이 장내 각종 병원균과 부패균의 증식을 억제함으로써 장내 이상발효, 묽은 변, 녹변, 변비 등을 원천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독특한 작용기전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각종 소화효소와 성장발육에 필요한 비타민을 합리적으로 배합한 소화정장유산균제로, 이후 품질개선을 거듭하며 5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워 브랜드로서 자리하고 있는 대표적인 장수의약품이다.
그렇지만 초창기 비오비타의 판매는 부진했다. 유산균제로서의 경쟁품은 거의 없었으나 당시에는 이스트제제가 유아용 정장제로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인기 만화가 김용환 선생의 캐릭터를 이용하여 '코주부 어린이'를 등장시킨 광고를 내고 국산화에 성공한 원료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당시만 해도 유산균이 대중들에겐 생소했기에 유산균의 효능과 효과를 알리는데 주력했다.윤 회장은 리어커를 구입해 직접 제품을 싣고 다니며 동대문 등지의 약국가를 누볐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비오비타의 매출은 서서히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일동제약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 제약사가 되었다.
윤 회장은 비오비타의 개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또 다른 신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비타민제였다. 당시 유행하던 미국산 비타민제와 달리 흡수가 잘되고 동양인의 체질에 맞는 제제를 개발하고 싶었다. 비오비타를 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원료 자체를 우리 손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의 ‘우리 민족의 건강은 우리의 힘으로 지킨다’는 신념이 다시 한 번 발휘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제품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여 1963년 늦여름, 드디어 일동제약의 간판 브랜드인 아로나민이 탄생하게 되었다.
시설투자도 지속했다. 의약품 창고를 새로 짓고 정제기, 자동포장기 등의 설비도 늘렸다. 총무부, 영업부, 생산부 등 업무단위 조직을 만들며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처음으로 공개채용도 실시했다.그렇게 1960년대 초, 윤 회장과 일동제약은 세상을 놀라게 할 준비를 끝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