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기술발전의 도약을 가져온 우수 의약품 생산

1960년대 말부터 해외 제약사들은 이미 원료를 생산하고 완제품을 유럽시장에 내놓으면서 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해왔다. 원료생산에 성공한 종근당은 이미 1979년에 50톤급 발효조를 모두 11기로 늘리고 대단위 생산체계를 완비했다.
고촌 이종근 회장은 관련 연구시설과 모든 작업의 시스템화를 위해 그 당시 40억원이라는 거액의 예산을 투입했다. 종근당이 리팜피신을 생산하게 되면서 국산 원료공급을 하기 이전 고가에 공급되던 제품가격이 저렴하게 공급되어 국민보건 향상 및 결핵 퇴치사업에 큰 몫을 하게 되었다.
또 수출도 급증하여 국내 제약업계의 최대 수출거대품목으로 부상했다. 1980년 싱가폴에 2만5천불을 수출한 이래 1993년에는 1,600만불 수출했다. 종근당은 1984년 6월 리팜피신의 FDA 승인을 신청하여 1985년 3월 세계 2번째로 승인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앞선 합성기술로 항생제 ‘클로람페니콜’, ‘테트라싸이클린’의 원료합성에 성공하였으며 1984년에는 세계 2번째로 ‘염산바캄피실린’의 합성에 성공함으로써 그 기술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
첨단 의약품 수출로 국가경제에 기여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촌 이종근 회장은 눈을 세계로 돌려 생애를 통해 모두 53차례에 걸쳐 해외를 순방했다. 날짜로 환산해보면 총 1천 1백 63일(3년 2개월)에 이른다. 순방을 통해 예리한 통찰력으로 얻은 정보는 의약품 수출의 전략이 되었으며 드디어 1969년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일본에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을 62만불 수출하게 되었다.
타 산업의 수출금액에 비해 소액이었으나 고도의 정밀화학 기술과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제약부문에서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인 일본에 의약품을 수출했다는 사실은 산업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 당시 국내 의약품 총 수출액은 110만불로 종근당은 의약품 수출액의 56%를 차지하는 경이적인 기록도 함께 남겼다. 특히, 1970년 미국 제약업계 랭킹 4위였던 워너렘버트사에 항생제를 수출했다는 사실은 한국 제약업계를 고무시킨 또 하나의 쾌거였다.
그 후 종근당은 1986년 수출 1천만불을 달성했고, 1990년에는 3천만불을 달성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종근당은 국가적 위기인 IMF관리체제 하에서도 상장 제약사 최초로 1999년 7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여 회사발전은 물론 국가경제에 기여했다.
제약산업의 수장으로 업계 발전에 남다른 공헌
1976년 대한약품공업협회의 9대 회장에 선출되어 많은 제약계 선배들의 뒤를 이어 국내 제약산업의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특히 고촌 이종근 회장은 업계 전체의 공동의 이윤추구와 연구기반 등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제약선배들의 업적과 발자취를 문헌으로 남겨 많은 회원사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의약도서실을 운영하고, 공동실험실과 의약정보센터를 설치했다.
한국 제약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펼쳤다. 1978년 한․중 제약공업협회를 결성하고 글로벌 제약단체인 국제 제약단체연합회(IFPMA)에 가입했으며 1980년에는 세계대중약연합회(WFPMN)에 가입하는 등 국제간의 협력증진을 적극적으로 도모한 것은 재임기간 동안 이룬 성과들이다.
한국의 경영자로서의 귀감

이렇듯 고촌 이종근 회장은 정직과 신용의 경영철학과 제약산업을 통한 생명경외의 큰 뜻을 전 생애 동안 펼쳤으며 이 나라 국민건강과 복지를 위해 종근당이라는 거목을 일으켜 세웠다. 평소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소신으로 기본에 충실하고 약업을 천직으로 전문성을 강조하는 생활철학을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실천하였던 고촌 이종근 회장은 1993년 향년 75세로 전 제약인과 가족의 애도 속에 소천하였다.
이후 2010년 인간생명의 존귀함을 지키며 한국의 약업보국을 실천한 선구자로서 한국 제약산업의 현대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조폐공사가 주관하는 ‘한국의 인물’에 선정되는 등 평생을 지고한 경영철학으로 기업의 정도를 걸어 오늘날 종근당을 이룬 그 뜻과 업적은 영원히 남아 길이 빛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