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라 불리기 원했던 유일한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자질을 갖고 있으나 이를 개발해 주는 교육이 부실했기 때문에 근세 초에 식민지 지배라는 수모를 겪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은 젊어서 한번의 교육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평생을 두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유일한은 자신이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 남가주 대학에서 경영학을 수강한 바 있고, 한국전쟁 시에 한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스탠포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것도 그 신념의 실천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소사공장이 재가동 됐을 때 유일한은 전직원으로 하여금 매월 일정한 기간 사내교육훈련을 받도록 했다. 대학교수와 사회저명인사를 초빙하여 당시 가장 필요했던 영어를 배우게 했고 제약회사 직원으로서의 기초지식인 의약품에 대한 교육도 시켰다.
전쟁 직후 집을 잃고 가난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은 그들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1952년에 소사공장 내 임시교실을 만들고 불우 청소년들을 모집했다. 그는 이들에게 학비와 숙식비를 제공하면서 기술 교육을 받게 했다.
1957년에는 서울 본사가 있는 대방동에서 ‘고려공과학원’을 개교하고 역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고려공과학원은 정부에서 인가받은 정규고등학교는 아니었으나 교육연차나 수업내용이 정규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인가 받은 정식 고등학교가 아니어서 우수한 학생들의 응모가 적었던 이유로 유일한은 정규고등학교의 설립을 다시 추진했다.

당시 이 학교는 학생들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좋은 시설과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당연히 우수한 학생들이 이 학교로 대거 몰려오게 된다. 또한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까지 병설한다. 학교 설립을 계기로 유일한은 명실상부한 교육가로 꿈을 이루게 된다.
또 시간만 있으면 유한공고를 찾아갔는데 수업에 방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저 쉬는 시간에 어린 학생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별세하기 몇 달 전에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학교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학생들과 그들을 위한 교육에 대해 애정이 컸던 것이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그는 자기가 일으킨 기업을 자손이 아닌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교육과 사회사업에 헌납하면서 1971년 삶을 마감했다.
유일한을 설명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표현은 ‘전 재산의 사회환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줌으로써 생애와 이념의 대미를 장식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유일한이 서거 후 1달 정도가 흐른 1971년 4월 8일,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와 학생들이 뛰어 놀 수 있도록 만들 유한동산 조성용 토지 5000평을 제외한 전 재산을 공익법인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한다는 것이다.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 외에도 사후까지도 변함없는 사회공익사업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재단을 설립한 목적 자체가 항구적인 사회공익사업을 펼쳐가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유언장은 유 박사의 신념이 응축된 당연하면서도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는 내용이었다.

그는 재물의 소유보다는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고, 일의 의미는 인간적 가치를 높여 주는 데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일다운 일을 하면 돈은 뒤따르는 법이며, 일은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에 그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입은 적고 돈벌이는 잘 안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한 봉사의 뜻을 남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