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에 결혼, 40대 중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험난한 육아전쟁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직장 맘이자 고령엄마의 눈물겨운 분투기. 매주 금요일 문윤희 기자의 생생한 체험담으로 찾아옵니다.<편집자 주> 

출산 직후, 편하게 쉴 수 없었던 사정

난산이라면 난산일 수 있는 과정을 겪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병실에 누워있었다. 대학병원은 가지 않아도 됐다. 빠른 응급조치 덕에 출혈은 다행히 멈췄다.

나는 어떻게 병실 침대에 누워있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유진이를 간호사가 안고 나가는 장면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연주의 출산을 하면 아이와 엄마 아빠가 계속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병상에 덩그러니 누워 눈을 깜박이다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불러 깨웠다.

남편은 "아기는 이것저것 살펴봐야 한다면서 간호사가 데리고 갔어"라고 말했다. 그럼 조금 있다 오겠지 생각했지만 아기는 오지 않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는 말이 어떤 건지 실감이 났다. 애를 쓰며 아기를 기다려 보려 했지만 두 눈이 감겼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날이 바뀌어 아침이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혈압을 재고 내 상태를 체크했다. "아기는 언제와요?" 내 물음에 간호사는 "이따 점심 드시기 전에 올 거예요"라고 말했다. 다시 만난 유진이는 자연출산의 흔적을 고스란히 얼굴에 담고 있었다. 태지를 일부러 닦아내지 않은 것은 태지가 주는 유익함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런데 아기 얼굴이 약간 어두웠다. 아빠의 피부색을 닮았거니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하얀피부가 아니니 아기에게 뽀얗고 하얀 피부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겠거니 했다. 아기는 플라스틱으로 된 침상에 누워있었는데 들어서 직접 안을 용기를 처음부터 내지는 못했다.

녀석이 용쓰는 것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는 잠깐이 지나자 유진이는 다시 신생아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병원 내 규율이 그렇다고 했다. 유진이는 다시 저녁에 돌아왔는데 30분 정도 우리와 함께 있다 다시 신생아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이틀은 눈 깜박 할 새에 지나갔다.

다음날 퇴원을 하려는데 소아과 의사의 콜이 왔다. 소아과로 내려가니 의사는 아기의 황달수치가 너무 높다고 했다. 보통은 황달수치 10 내외를 유지해야 하는데 유진이는 13을 넘기고 있었다. 의사는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태어난 지 3일된 유진이의 발바닥에 바늘이 꽂혔다.

유진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신생아실 간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바닥에 난 구멍으로 피를 짜내려 안간힘을 주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발바닥을 저리 쥐어 짜내다니. 너무 화가 났다. 눈물도 났다. 간호사는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피를 뽑는 관을 얼추 채운 듯 급히 사라졌다.

우는 유진이를 안고 훌쩍이니 다른 간호사가 와서 퇴원 수속을 밟아야 한다고 했다. 병원은 참으로 친절했지만 또 냉정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유진이와 짐을 챙겨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할 차비를 마쳤다. 소아과 의사는 혈액 검사가 나오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조리원에 도착 후 짐을 막 풀려는 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유진이의 황달 수치가 14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점차 높아질 것 같으니 재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학병원 소아과로 가는 방법도 있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나는 내가 입원했던 병실에 퇴원한 지 채 4시간이 되지 않아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유진이가 태어난 지 3일만에야 온전히 하루를 유진이와 보낼 수 있었다. 유진이는 광선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에 누워 있어야 해서 안고 있지 못해 서운했다.

광선치료를 받고 있는 유진이.
광선치료를 받고 있는 유진이.

 

아기를 내려다보며 있는 사이 신생아실 간호사는 아기에게 줘야할 분유를 담은 젖병 여러 개를 냉장실에 넣으며 두 시간 간격으로 데워서 주라고 했다. 만 하루를 꼬박 광선치료를 받으며 유진이를 돌보는데 내 몸이 성치 않으니 몹시 힘들었다.

신생아실 간호사는 분유를 보충해 주기 위해 대여섯 시간 간격으로 병실을 찾았는데 동틀 무렵 내가 너무 힘들다고 하자 "신생아실에서 봐도 되는데 말씀하시지 그랬어요"라며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투로 응대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불의를 잘 참는 소심한 성격 탓에 "몰랐다"고 부끄럽게 답했다.

엄마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길이 없는 유진이는 다행히 다음날 또 한 번의 혈액 체취 과정을 거쳐 황달 수치 11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여전히 안심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었지만 의사는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내가 선택한 산후조리원은 소아과 병원 원장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오전마다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해 주었다. 나는 원장에게 당부를 전했다. 황달 수치를 매일 확인해 달라고. 유진이는 산후조리원에서 다시 황달 수치가 높아지지 않았지만 내 노파심에 모든 선생님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아기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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