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폭염이 시작되면서 여름 구두를 신기 위해 신발장을 열었다. 층층이 몇 켤레의 구두가 놓여있다. 구두 중 잠시 머뭇거리다 망사 구두를 꺼냈다. 뒷굽이 많이 닳았고 앞 부분도 망사가 많이 풀려 너덜거린다. 문을 나서면서 몇 번이고 구두코를 들여다보고 또 발을 들어 뒷굽을 보았다. 더 신어야 될지, 버려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래도 몇 년을 밑바닥에서 내게 말없이 순종한 구두인데….

구두는 온 몸의 하중을 받는다. 어쩜 삶의 무게를 그대로 떠안고 지탱하면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 게 구두다. 중압감에 눌려 고통스럽지만 말이 없다. 오죽하면 구두굽이 닳겠는가. 구두굽이 닳는 만큼 삶이 무겁고 고달픈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구두굽이 많이 닳은 낡은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경륜과 함께 왠지 모를 측은함마저 느껴진다.

이 같은 느낌은 굽이 닳아 없어질 만큼 부지런히 때론 정신없이 뛰어다닌 자기 삶에 대한 남모를 연민과 애정이 배여있기 때문이다. 너덜대고 뒷굽이 닳은 낡은 구두는 결국 버려진다. 우리 인생의 삶도 그 낡은 구두의 마지막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뒷축이 닳아 뭉툭해진 구두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결코 무심할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몇 해 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말 서초동 법원 앞을 간 적이 있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변호사로 있는 지우(知友)가 점심 초대를 해서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와 식당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 구두 뒷축이 반쯤 떨어져 너덜거린다.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꼈지만 너덜거리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발을 질질 끌고 갔다.

변호사가 눈치를 채지 않은 것 같아 다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반주를 곁들인 오찬을 나눈 후 막 나오려는데 변호사가 내게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일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하면서 따라오란다. 구두 매장이다. 좀 전에 구두뒷축이 떨어져 너덜거린 것을 본 것이다. 사양할 입장이 아니라 기왕이면 여름구두(망사)를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그 망사구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뒷축이 너덜거리는 구두 역시 10여년의 세월을 나와 함께 동거하며 한마디 불평도 없이 내 발을 지켜준 고마운 구두다. 그러나 망사 구두를 신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가슴은 아프지만 구두 매장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고마움을 전하며 이별을 고했다. 버려진 그 낡은 구두는 이번에도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하듯 아무말이 없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 낡은 구두는 내게 어떠했는가. 추위 속에서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찬바람 쌩쌩 부는 길을 걷기도 했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구두는 닳아서 미끄러지기 십상이었고, 녹은 눈이 진창으로 둔갑해 질척거리면 구두는 진흙뻘 속에 잠긴 꼬막 신세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폭염이 지속되는 한여름이면 그 구두는 땀에 절어 고약한 냄새에 질식할 정도였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구두 속까지 흥건하게 물이 스며들어 양말이 축축하게 젖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구두는 불평하지도 않았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못난 주인을 위해 이곳 저곳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다녔다. 그래서 때로는 들여놓지 말아야 할 곳에도 가고, 또 오래 머물러야 할 곳에서는 곧 떠나는 주인의 우매함에도 상관없이 묵묵히 따라주었던 구두였다. 그 주인이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니던가. 이제 그런 인연으로 함께 한 망사 구두가 낡고 닳아 이별을 생각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닳고닳은 구두를 보면 그것을 신은 사람의 자세,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마저 미루어 짐장할 수 있다고 구두 수선하는 분이 한 말이 생각난다. 그 동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구두를 신고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 했고 이리저리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숨길 수 없는 자기 인생이었다. 내 인생의 굵고 큰 행보에서 세세하고 소소한 행로까지 굽 닳은 낡은 구두는 모두 알고 있다.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그 낡은 구두가 내게 소리없이 말한다. 앞으로는 어두운 밤 무순 사색가인양 쓸데없이 길거리를 헤매며 다니지 말라고. 또한 “이 세상에 뭐 이런 게 다 있느냐”며 길바닥의 작은 돌이라도 차버리지 말라고. 또 무슨 생고생이냐고 삶에 대해 불만도 하지말고 제발 화가 나더라도 발길질은 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는 낡은 구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구두는 진창이든 돌길이든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라간다. 때로는 더러운 것을 밟기도 하고 중압감에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주인에게 순종한다. 그것이 구두의 본분이라 생각하나보다.

가장 무더운 여름을 떠나보내고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맞을 채비를 하며 우리가 삶에서 가장 아래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구두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가장 낮은 것, 가장 낮은 곳에 놓은 것들이 내 삶의 화려함과 우쭐함으로 거만했던 주인을 위해 얼마나 소리없이 흐생했던 것인지를, 인간과 달리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마침 올 여름에도 한 지인이 “발로 뛰는 목사님 발이 시원해야 한다”며 여름 망사 구두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래서 잠시 망설였다. 낡은 구두, 뒷축이 닳은 구두를 버리고 새 구두를 신을까해서다. 낡은 구두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쩜 배신감을 느끼는 비애의 눈초리다. 순간 울컥해진다.

선물로 받은 새 구두를 개척교회 목사님에게 선물로 보내고 이참에 여름구두 네 켤레를 별도 주문, 개척교회 목사들에게 부쳤다. 그리고 뒷굽이 닳은 낡은 구두를 수선했다. 풀어진 올은 붙이고 닳은 뒷굽은 새 창으로 갈았다. 아주 새 구두가 되었다. 새 단장을 한 낡은 구두가 무척 기뻐하는 것 같다. 몇 년은 더 신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누가 구두 뒷굽을 갈면서 신는 사람이 있나요? 그냥 버리고 새 것으로 사 신는 세상이 되어버렸잖아요. 구두를 보면 그 주인을 알 수 있어요. 구두는 주인을 닮거든요.” 구두 수선사의 말이다.

삶의 무게를 버티며 묵묵히 인생길을 함께 해온 구두, 기업가나 국회의원 운전기사처럼 주인을 배신하지도 않는 뒷축이 닳고 낡은 구두, 구두약을 바르고 반짝 윤을 내면서 성큼 다가오는 시원한 가을 바람에 맞춰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그런 구두를 내게 선물한 변호사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부족한 주인을 몇 해 동안 함께 해준, 그래서 “낡고 닳은 구두야, 고맙다. 고맙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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