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동물인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일로 바쁘게 살면서도 간혹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질 때가 있다. 구체적인 반성의 계기와 사정은 각기 다를지언정 자신을 돌이켜보며 성찰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한결같이 ‘이 험난한 세상’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상’을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나가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가치와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굳이 성서를 인용하지 않아도 인간은 매우 제한된 물리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지어진 신(神)이 창조한 피조물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들은 부족한 자원,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싸움을 벌이면서 종족을 유지해왔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 중 유일하게 본능을 넘어 빼앗을 줄도, 나눠줄 줄도 아는 존재다. 사실 인간 이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결코 주어진 본능을 넘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일지라도 배부를 때는 먹이를 찾지 않는다. 살생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은 다르다.

사랑보다 대립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는 살생까지도 거침없이 행한다. 먹고 자는 문제와 무관하게 같은 동종끼리 물고, 뜯고, 죽이는 싸움을 끊임없이 벌이는 존재는 어쩜 이 지구상에서는 인간 외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는 이런 행위를 ‘자유’ ‘민주’ ‘정의’ ‘능력’ 이라는 미명아래 정당화 시키며 끗발 있는 자로서 자신만의 영화와 부유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시청언동(視聽言動)에서 부귀빈천(富貴貧賤), 그리고 환란사생(患亂死生)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들의 변화가 있다. 이 같은 사태의 변화 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잠식하면서 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인간은 앞서 언급한 감성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는 품성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자신은 배고프고, 허기질망정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존재 또한 오로지 인간뿐이다. 아울러 인간이외는 자신이 주리고 허기짐에도 먹이를 양보하고 동정심에 이끌려 자기의 먹이를 내어주는 지각 있는 동물들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善惡果)’의 말씀이 생각난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벌거벗은 허물을 보며 어둠속으로 숨어야 했다. 또한 하나님의 질타 속에서도 반성에 앞서 자신들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며 변명을 한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세상을 살면서 서로가 다투고 이간질하며 살아가게 된 것 같다.

이 부분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사회학적 해석과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선악과는 다름 아닌‘잉여소유’ 또는‘사적소유’의 역사적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인간 사회는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잃고 타락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가르침은 ‘희생과 나눔’이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 인간이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 길로 가야한다. 그 속에서 인간 자신의 삶의 세계를 질서와 조화가 있고 따뜻한 정감이 오가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인간이란 몇 살이 되든지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의 이유가 다 있으며 그 또한 나름대로의 역할이 주어진다. 이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쭐함을 버리고 삼라만상의 일원으로서 자연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누군가 “사는 것이 숨박꼭질 하는 것 같고 그리고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런 게 인생” 이라고 말했던 것이 어렴풋 생각이 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삶을 매일 같이 계속하면서도 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정작 사는 즐거움을 모르고 소득과 소비의 경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며 파괴적인 삶의 패턴을 확대하고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본능적으로 집단 욕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풀이나 나무는 총생(叢生)하면 잘 자란다. 그리고 채소나 곡식 또는 묘목도 밀식(密植)하면 웃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도 여럿이 어울려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면 그 삶이 즐겁고 평화로우며 개인은 물론 조직이나 사회가 발전을 하는 것이다. 생존경쟁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경쟁은 필요하겠지만 남이 살아야 나도 산다는 이치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지독한 외로움으로 사랑을 절실히 원하면서도 사랑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모순적인 삶을 사는 것 같다. 떡 먹듯 쉽게 헤어지는 아픔, 그로 인해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친밀해지는 것 조차 두려워하며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요즘 세태는 사랑의 현실 앞에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분노하며 사랑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 서로 사랑하자” 라는 이 말을 밥 먹듯이 쉽게 내 뱉기도 한다. ‘사랑’에 대한 그 필요성과 필연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 사랑이라는 것이야 말로 온 인류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허다한 문제를 삭이는 묘약임에는 틀림없고 이 같은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그 앎과 형식적인 구호만 난무 할 뿐 정작 그 사랑의 실천에는 별로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득을 위해 사랑을 내팽개친 채 남을 비방하고 서로 헐뜯는 따위의 정치인들의 작태는 우리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자연의 삶 속에서 이웃을 섬기며 버릴 것은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나눌 때만이 비로소 좋은 정치를 하는 정치가가 되고 좋은 세상이 되리라 생각된다.

“쏟아지는 것이 어디 햇살뿐이랴/ 흘러가는 것이 어디 세월뿐이던가/ 오늘도 거짓된 욕망 짊어 매고/ 검버섯 길 재촉하며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여/무심한 빗줄기에 찢기 운 채/ 바람 따라 흩날리는 낙엽처럼 짓밟히다간/ 몇 평, 땅 한 줌의 흙으로 묻혀 질/ 삶 일진데/ ~~~나는 피보다 더 붉은 마음으로 울부짖는다./<심송 ‘빛의 향연’ 중에서>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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