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고유의 명절인 ‘설’을 맞이하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들 뜬 기분이 된다. 또 이맘때쯤이면 고향을 찾는 차량들이 밤이 깊어지도록 빨간 실선으로 줄을 잇고 달린다. 또한 설날 아침에는 조상들의 넋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부모, 형제, 친지, 친우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덕담을 나누면서 복 된 한 해가 되기를 서로가 기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행위와 기원은 우리 모두가 앞날의 운명을 알 수 없기에 가능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알면서도 잊고 사는 게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두 글자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예측이 가능하고 또 그 날을 알 수 있지만 죽음이란 언제 어느 때 우리를 찾아 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행일까. 우리는 망각이라는 이름아래 그 같은 죽음에 대해서는 잊고 살아왔다. 그래서 언제나 이 세상을 영원히 살 것처럼 과욕을 부리는 등 남을 비난하고 헐뜯으며 하루하루를 자신도 모르게 늙어가며 살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생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갖는다. 태어나는 날을 알 수 있듯, 죽는 날을 미리 알 수 있게 된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 밖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을 하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거역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사람들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가운데 선(善) 과 악(惡)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사랑보다는 증오를 키우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란 대자연에서의 아주 작은 미물로서 이 세상을 어차피 떠나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기에 이 세상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따라서 남을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지옥과 같은 이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어느 쪽이 더 행복하고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진지한 반성이며 삶에 대해서는 보다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흔히 인생을 배우려거든 눈물과 슬픔의 이별이 있는 상가(喪家)집을 찾으라는 말이 있듯 일찌감치 삶이 죽음을 완성해가는 과정, 혹은 죽어가는 과정이라 느꼈다 해도 어느 누구인들 죽음 앞에서 과연 죽음이 존귀하고 아름다움의 순간임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인생 최고의 피날레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행복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지키고 만들 수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밤’ 이라는 마음에서 유서를 써보는 것이다. 잠시 후에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가정해보며 그 죽음을 맞이하는 예행연습을 해 보자는 거다. 이쯤 되면 그 누구라도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 찬 심정에서 남기고 싶은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정리해 보는 거다. 한 가지라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반성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 가족을 비롯한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화해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매듭을 풀려하고 자신으로 인해 실족했거나, 고통을 받았거나, 했으면 과감하게 화해의 손길을 보내는 등 떠나가기 전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죽음의 연습과 유서를 쓰는 것은 죽음 앞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자기를 돌이켜보는 계기를 마련 할 수 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진지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진솔한 자기고백을 하는 등 떳떳할 수가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침묵으로 우리에게 느낌으로 전해준다.

90년대 초 신학대학원 재학 중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1년간 인턴(임상목회-상담)과정을 밟을 때다. 그 때 암 병동을 맡았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과의 상담을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체험 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분노와 함께 떠나는 순간까지 고통에 시달리며 가족들을 애타게 하는 이들, 의연하게 죽음을 아름다움으로 맞이하며 염려하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늘 가슴이 아팠고 종교적인 회의감마저 들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암에 걸려 고통을 당하며 죽음을 맞이할 때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가슴을 쥐어뜯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 적도 많았다.

TV뉴스에서 공원묘지에 붐비는 성묘객을 보면서 땅을 기는 애벌레로 짧은 생을 마치지 않고 나비처럼 탈바꿈 되어 좀 더 높은 것을 자유롭게 날듯이, 그래서 더 큰 사랑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임진년 새해에는 좀 더 이웃을 사랑하고 베푸는 삶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언젠가는 홀로 떠나가야만 하는 인생. 너무 탐욕에 빠져 용쓰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이웃과 함께 나눠 쓰며 하루를 살아도 가치 있게 사는 우리 되자. 굳이 종교를 들먹이는 것은 그렇지만 ‘우리의 생명을 주신 이도, 거둘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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