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골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도대체 골프가 뭐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가, 속설을 모조리 살펴보았고, 중간 중간에 바람직한 골퍼의 자세, 풍토, 외국과의 문화적 비교도 곁들였다.

물론 “골프는 할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확답하는 쪽에서였다.

연재하는 동안 내내 필자는 ‘골프는 섹스’라고 했다. 저속한 표현인줄 알지만 골프의 속성을 쉽고 빠르고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한 홀 한 홀, 꽃처럼 그 자리에 있는 코스를 여성성이라 한다면 나비처럼 그 위를 돌아다니며 골프를 치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남성성이라고 했다.

골프나 섹스나 잘 되는 것 같으면서 마음대로 안 되는 ‘이성과의 놀이’인 것이다. 쉽게 따먹는 이글을 갈망하고 당일치기 홀인원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잘 안 될 수록 더 말이 많아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럴수록 ‘골퍼의 골프 고픔’이나 ‘남성의 여성 고픔’을 마찬가지로 심해진다.

어쩌면 골프는 배우지 않아도 - 성교육이 없어도 섹스를 하게 되듯이 - 할 수 있는 능력을 애초에 가지고 있는 본능의 놀이일 수도 있다. 때문에 때가 되고 기회만 주어지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운동이 되는 것 아닐까.

골프의 기술에 대한 지침을 기대한 독자들은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골프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널리티를 발달시켜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리 잘 하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가 않는다.

진지함과 유머 감각을 동시에 익히고 심신을 유연하게 하여 이성을 사랑하려는 노력 - 다시 말해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이는 정복이 어려운 것이다. 마치 섹스에서의 만족도가 상대와의 일체감 여부에서 정해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혼자만의 쾌감을 추구하며 순간에 목숨을 걸 듯 단순하게 임하는 사람이 ‘버디’를 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버디를 잡는다는 것과 골프를 정복한다는 것은 뜻이 다르지 않을까.

언뜻 생각하면 세상은 아주 단순하다. 크게 나누면 두 갈래일 뿐이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요, 기쁨이 아니면 고통이고, 만남 아니면 이별이요, 낮이거나 밤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여성 아니면 남성이다. 그것이 고정된 상황이면 정말 단순한 게 맞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돌며 변화한다는 데 있다.

밤이 낮이 되고 다시 밤이 된다. 중년을 넘기면 남자는 여성 호르몬 분비가 많아지고 여자는 그 반대이니 성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셈이다.

인생이나 골프나 결국은 그렇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극단 사이를 유영하는 것이다. 이마에 핏줄을 세우고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헤쳐 갈 것인가, 유유히 즐길 것인가….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흔히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흥분과 쾌감을 주며 몸에 해롭지 않으면서 연속성을 갖게 하는 술, 담배, 차, 커피 따위 음식을 기호식품이라 하는데 이 말을 빌리면 골프나 섹스는 ‘기호운동’에 속한다. 누구나 즐기고 좋아하며 필요한 흥분과 쾌감을 주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골프를 수용할 수 있는 자질을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것이 맞다면 골프의 발상지 운운…하는 것은 정말로 부질없는 따분한 논쟁이다.

발상지를 따지느니 창세기 골프를 상상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에덴에서의 아담과 이브가 정 나누는 모습은 저절로 그려지듯이….

물론 애초에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해도 중요한 것은 잠재되어 있는 그 자질을 언제 끄집어내서 어떻게 습관을 들이냐 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은 습득된 결과라는 점에서 선천적 반응과 구별된다.

우리나라 골프가 비싸네, 너무 귀족화 되었네, 퍼블릭 다운 퍼블릭이 없네 하고 불평들을 하지만 어느 새 필자부터 한국식 골프에 길들여져 있음을 절감한 사례가 몇 해 전에 있었다.

2004년 초 뉴질랜드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막내 딸의 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여행이었는데 북섬, 남섬을 다 돌아도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넉넉했다.

하루는 심심하여 오클랜드시 센츄럴파크 내에 있는 골프장에 들렸는데 혼자도 돌 수 있는 곳이었다. 클럽과 골프화 빌리는 값이 뉴질랜드 달러로 12불, 그린피는 15불이었다.

직접 끌고 다니는 카트에 클럽을 싣고 1번 홀을 향해 걸어가는데 한국인 한 명이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혼자 오셨으면 같이 치실까요”

필자는 반가워서 흔쾌히 함께 돌자고 했다. 그는 자기 소개를 했다.

“아들이 여기 있어서 석 달 전에 왔는데, 골프 외엔 할 일이 정말 없네요.”

골프는 말도 필요 없고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라는 말일까? 1번홀 티그라운드 가까이 가니 티업을 기다리는 사람이 다섯이나 있었다. 그러자 예의 한국인은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린 저기 5번홀에 가서 칩시다.”

나는 ‘아니, 무슨 골프를 그렇게 합니까?’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웃었다.

“나도 처음엔 이상하더라고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니까. 그러나 몇 번 해보니 적응이 됩디다.”

5번 홀에서 8번 홀로, 다음은 4번 홀 식으로 홀 아웃한 그린에서 티그라운드가 가깝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홀에 가 치는 것이었다.

그는 적응이 되었다지만 내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언도 구하고 장난(?)도 받아줄 캐디가 없는 것만도 낯설고 불편한데 질서도 없이 골프를 한다는 게 도무지 어색했다.

결국 다섯 홀인가 돌고 그만 두었다. 그만큼 필자부터가 한국식 귀족 골프에 익숙해져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골프 문제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이 글을 애독한 사람이라면 ‘골프는 이성을 사랑할 수 있는 인격과 기술을 요구한다.’는 사실 하나만 불변의 진리처럼 가슴에 넣어두기를 바란다.

그런데 골프가 그렇게 태초의 운동이라면 어디까지가 하나님 섭리의 영역이고, 어느 부분이 사탄의 유혹이 깔린 함정일까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소설가(小說家). 다인(茶人). 여행가(旅行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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