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홀을 마치고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면 허망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꼭 집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공들이고 노력한 것에 비하면 너무 남는 이야기가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골프에서 상처나 입지 않으면 됐지, 뭘 바라느냐 하겠지만 그래도 시간도 투자했고 돈도 많이 썼는데 갖고 가는 이야기가 너무 없는 것 아닐까.

우리의 골프장들은 정말 아무런 이야기도 주지 않는다. 그저 땅바닥에 여자 엉덩이 같은 그린을 만들어 놓고 구멍도 파 놓았으니 각자 멋대로 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라고 한다. 달 착륙을 연상케하는 특색 있는 홀에나 ‘아폴로 홀’ 따위 이름이 있을까, 일반적인 홀에는 이름 붙이는 서비스조차 인색하기 짝이 없다.

땅바닥에 최초로 구멍을 파 놓은 이는 누구일까? 아담과 이브를 지으신 하느님은 아닐 것이다. 이브를 만들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신 분이 땅바닥에 구멍을 만들어 과부되는 꼴을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반대되는 쪽이 그랬다면 범인의 윤곽은 쉽게 그려진다.

사탄이 땅바닥에 여자의 것과 비슷한 엉덩이를 만들고 구멍을 파 놓음으로서 아담(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혹한 것이다. 참을성을 소모시키고, 노기는 충천시키고, 거짓말, 속이기에다 욕까지 가르쳐 이브는 물론 하느님 보시기에도 용서 못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땅바닥에 구멍을 파 놓은 것은 사탄의 대성공이었다. 하느님도 깜짝 놀랐을 것 같다. 인간이 저렇게 악질이었나?… 목적은 없지만 천국에 가지 못해 결국 사탄의 추종자가 된 요정들은 골프를 예찬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최초에/ 땅바닥에다/ 구멍을 뚫어놓은 그 분을/ 모두 찬양하자/ 지루하고 따분해서/ 죽을 것만 같은 인생이/ 그분 덕분에 풍성해졌네/ 사랑은 한 순간/ 결혼은 인내가 아니던가/ 하던 일도 언젠가 은퇴하지만/ 내 삶에 골프는/ 평생의 반려라네/ 찬양하자/ 최초에 땅바닥에다/ 구멍을 뚫어놓은 그 분을/ 모두 찬양하자.

골프에 열광하는 사람에게 공통된 꿈이 있다면 심심산천에 있는 평당 천 원도 안되는 싸구려 중의 싸구려 산이나 임야를 능력껏 사서 골프장하나 만들 수 없을까 하는 망상이 아닐까.

수백 억 들여 명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3000만 원쯤 하는 중고 포크레인 하나 사서 그곳에 두고 (면허도 직접 딴 뒤) 주말이면 내려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티그라운드 조금, 세컨샷 할만한 페어웨이 조금, 그린 조금, 이렇게 만들어 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다.(그 정도면 허가도 까다롭지 않을 것 같고 환경단체와 부닥칠 일도 없을 것 같다.)

클럽하우스는 대청마루가 있는 초가집이면 족하고, 제주도 조랑말을 몇 마리 키우거나 몽골에서 필요한 만큼 수입하여 골프 카 대신 캐디백을 양 옆구리에 차고 다니게 한다면? 그러면 아주 이상적인 골프장이 되지 않을까.

친구나 선후배, 직장 동료, 업계 파트너 등 몇 번만 초대하면 “거기 한 번 가고 싶다”는 전화가 줄을 이을 것 같다. 고급화 명문화로 대변되는 가공의 전통과 권위주의가 만연된 사회일수록 새롭고 파격적이고 자연적인 속에서 현대적 놀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은 강한 법이 아니던가.

반취에게도 그런 꿈이 있었다. 그래서 한 홀 또 한 홀, 코스가 만들어지면 동서양의 유명한 요정을 각 홀의 정령으로 모실 생각을 했다.

홀을 두고 여성을 의인화하다보면 홀 하나 하나에 정령이 있음도 가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령이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신령한 기운으로 독립적 단위의 영역에 생성되는 만큼, 홀 단위로 정령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재미있지 않을까?

이름을 짓는다면 ▲첫 홀은 이란의 난장이 페리스(Peris)가 좋을 것 같다. 향기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페리스는 세례를 받기 전에 죽은 갓난아기의 영혼이다. 골프채를 잡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영혼인 것이다.

▲둘째 홀은 아일랜드의 레프리콘((Leprechaun). 전에 이 녀석이 나오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아주 온순한 요정으로, 땅굴 속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한쪽 구두만을 만들고 있다. 골프에서 쓰는 한쪽 장갑이 그들 작품이다.

▲셋째 홀은 밴쉬. 머리를 길게 기르고 푸른 옷에 회색 망토를 입은 창백한 여성 모습이다. 죽음을 경고해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악한 요정은 아니다.

▲넷째는 라낭쉬. 자기에게 매혹된 남자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소문이 나돌지만 실제로는 시인이나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요정이다.

▲다섯째는 드워프. 북유럽 신화에선 손기술이 뛰어나 무엇이든지 잘 만드는 재주꾼이다. 톨킨의 소설 ‘반지 이야기’에선 훌륭한 나뭇꾼이면서 동시에 용맹스런 전사로 등장한다.

▲다음은 엘프(elf). 마법에 뛰어나나 대신 체력이 약하다. 하지만 순간 도약력이 세고 민첩하다. ▲다음은 그리스 신화의 님프 ▲프랑스의 페 ▲페르시아의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페리 등으로 아웃코스를 만들고 아웃코스 이름은 ‘수칼루(sukkallu)’로 한다. 수칼루는 주신을 섬기는 무리의 대표로 국회와 같다.

인코스는 ‘구잘루(guzalu)’가 좋겠다. 구잘루는 행정부다. 아홉 홀은 ▲슬라브의 흉악한 바바 자가(baba jaga), ▲스칸디나비아의 바위보다 더 단단한 거인 트롤 ▲영국의 로빈 굿펠로 ▲스코틀랜드의 브라우니(brownie) ▲독일의 못생기기로 유명한 난장이 코볼트(kobold) ▲파우스트에 나오는 잉크부스(incubus) ▲러시아의 도모보이(domovoy) ▲제1차 세계대전 때 생겨나 요정치고는 나이가 어린 그렘린.(1,2차 세계대전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행기의 날개를 부러뜨려 추락시킨 못된 요정이다.) 그렘린은 기고만장한 골퍼에게 접근해서 여지없이 추락시킨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세라핌과 ▲케루빔 등을 적당히 배분하면 어떨까. 온 세계의 요정을 각 홀 배치한 뒤 요정 - 나아가 사탄을 이겨내는 골퍼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하느님을 추종하는 자로서의 의무를 다해 보는 것은?

그리고 보면 그것이 골퍼의 사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골프를 정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준다면 세계에 없는 환상의 골프장이 되지 않을까?

[소설가(小說家). 다인(茶人). 여행가(旅行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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