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다보니 지금 우리 사회는 과학 물질 만능주의의 팽배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사라진지 오래됐고 거짓과 부도덕이 주인처럼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의 이념 논쟁으로 갈등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어수선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뻔히 드러날 사실들을 임시 웅변 식으로 둘러대는 청문회 후보자들의 거짓 증언. 이와 함께 당리당략을 먼저 생각하고 논쟁만 벌리는 국회의원들. 생각 할수록 앞날이 걱정이 된다. 그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애꿎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고통을 당하며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게 아닌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와 수도원의 수도사는 스스로가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다. 또 이들은 그 같은 세상과의 격리된 상태에서 고독하고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격리된 재소자의 경우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불평을 하고 남을 저주하면서 하루하루를 괴롭게 보내는 지옥 생활이지만. 자의에 의해 수도사가 된 경우는 아무리 환경이 힘들어도 불평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올 곧은 믿음과 맑은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즐거운 낙원이 된다. 결국은 마음먹기에 따라 똑같은 여건 속에서도 느낌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민수기를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사람의 정탐꾼 이야기다. 그 중 열 명은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들이 본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이 보고는 한 사람이 아닌 다수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러나 두 명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느낀 것을 보고 했다. 똑같은 상황을 정탐하며 보고 듣고 왔지만 그들의 보고는 완전히 180도로 달랐다.

이 같은 유사한 일이 조선시대에서도 있었다. 일본국의 상황을 정탐하기 위해 계파가 다른 두 명의 사신을 보냈지만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보고 내용이 전혀 상반된 보고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여. 야 국회의원들이 똑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는데 왜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까. 결국 이런 보고의 차이의 답은 ‘마음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에서의 단점이기도 한 다수의 의견이나 큰목소리가  언제나 옳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여야가 각기 다른 잣대를 갖고 줄다리기식의 논쟁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이나 미디어 법 등이 그렇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논쟁을 벌리다보니 애꿎은 다수의 백성들만 상처를 입고 울게 되는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으로 공인이 되었으면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말로만 국민을 판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현실은 매우 어렵다. 백만의 실직대란을 예고하면서도 무대책인 정부,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반정부 단체의 시국선언, 일부 강성 노조원들이 투쟁, 망 말을 하며 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구(犬) 정치인.  국가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실리를 먼저 찾는 정치야바위꾼을 감안하면 미래가 불투명하다. 또 사회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많은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 국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이런 외부적인 조건 보다 마음의 불안이 더 크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형(形)의 사람들이 있다. 모자라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줄자형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견만을 강조하는 망치형이 있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기만 하는 실톱형이 있는 가하면 무조건 달라고만 하며 쥐어짜는 바이스형도 있다. 그리고 괴팍한 성격에 남을 갈아대며 성질을 부리는 그라인더형이 있다. 또 지나간 자리에 상처를 크게 남기는 도끼형이 있는 가하면 매사 일관성 없이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형도 있다.

똑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각기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것일까.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인내를, 인내를 통해 인격을, 인격을 통해 꿈과 소망을 이루게 하는 작업을 통해 사람들을 수련 시키는 것 같다.

즉 그들의 각기 다른 행태를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관계는 남남으로서의 적대관계,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 보존적이며 의존적인 이 시대의 동행자이자 지구촌의 한 가족의 관계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 이웃을 생각하며 나눔과 섬김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나라와 사회에, 그리고 크게는 인류에게 환원하는 것이다. 미국의 조지 휫드필드 목사는 “내가 녹슬어서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라고 했듯이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인간성 회복이다.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에 자신이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할 책임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보다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나눔의 정신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며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 하는 사랑은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기 본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 가 아니라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타인 본위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인 ‘아가페’ 다. 다시 말해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절반(50%)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내가 갖고 있는 절반 역시 타인의 인생을 좌우 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같은 말이 무심결에 잊고 지나쳐버린 말이되지만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 같다.

프랑스의 로망롤랑의 말처럼 우리 인생은 한 번 출발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편도의 길을 가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 되돌아 올 수 없는 시간속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치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며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후회와 아쉬움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자괴감과 상실감에 빠지게 되지만 그 때는 너무 늦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결과를 너무도 잘 아는 우리이기에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인이 그렇다.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말처럼 정치에선 절대 선(善)도 절대 악(惡)도 없다. 다만 부분의 선과 부분의 악을 공유 할 뿐이다. 따라서 상대가 적 또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자, 또는 협력자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 확신의 증오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현실이 느껴지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직무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논쟁만 일삼는 여야 정당 의원들이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당리당략에서 싸우는 저런 국회의원들이라면 차라리 국회를 해산 하자”며 분노하는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실리를 추구하기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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