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5일은 장충체육관에서 예비역 장병 및 외국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 59주년 기념식이 있었고 29일은 2002년 북한 해군의 기습도발로 촉발된 제 2연평해전 7주년 기념식이 당시 전투부상자와 유가족 그리고 한승수 국무총리 등 시민.학생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특히 이전 정부에서는 변변한 추모 행사를 갖지 않고 지나쳐버렸지만 다행히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제2연평 해전으로 명칭이 격상되고 행사도 치러지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 바다를 사수하다 전사한 여섯 분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제 2연평해전은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쯤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2척이 대응 출동한 우리 해군 고속정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25분 간 교전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아깝게도 우리 측 윤 하영 소령. 한 상국. 조 천형. 황 도현. 서 후원 중사. 박 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고 참수리 375호는 침몰했다.

그 당시 북한군의 선제공격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이 잘 싸워 줬고 승전에 버금가는 전쟁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동두천 여중생 사망사고로 인한 촛불시위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등 당시 정부의 외면으로 국민들에게 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같은 참사는 98년 김대중 정부의 집권과 함께 강조된 햇볕정책으로 인해 군이 북한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 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당시도 군에서는 북한의 도발을 예상하고 만약을 대비해 야간 훈련까지 실시하며 즉각 격파 사격을 할 만큼 준비가 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제 전쟁은 없다며 선제사격절대금지. 확전금지. 서해북방한계선고수.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애매모호한 작전 지침을 내리는 바람에 자위권 마져 행사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우리 해군이 록온(Lock on)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북한 함정이 우리 함정을 들이 받아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깝게도 우리 장병 6명이 희생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올해로 6.25전쟁 발발 59주년이 되는 해가 됐지만 이 역시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선 관심도 없고 참여도 안 한다. 한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던 6.25 전쟁은 수많은 외침과 전란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뼈아픈 추억이다. 이 전쟁으로 60만 명이 넘는 인사가 죽거나 납치를 당했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남한에서만 군인이 13만 8천명이 전사하고 44만3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물질적 피해액으로는 4123억 원에 달하고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어 세계 전쟁사상 군인보다 민간인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최초의 전쟁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만큼 동족 상잔의 비극과 고통은 지금도 무거운 역사의 짐이 되어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북한의 대남 도발은 1950년 당시 미국이 한반도를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것이 빌미가 될 수 도 있었겠지만 더 큰 원인은 남한 내 박헌영이 주도한 남로당의 활동으로 공산당에 가입한 인원이 50만 이르렀고 남한 인구의 절반이 넘는 65%가 이들을 동조 할 정도로 엄청났다는데 있다.

결국 김일성은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침 계획을 수립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바라던 인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아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 당시 안보체계와 반공의식으로 국민들이 뭉쳐 있었다면 김일성의 무모한 군사도발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보체계가 무너져 공산화가 된 베트남이 그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베트남의 4.5%의 공산주의 지배지역이 95.5%의 자유민주주의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적화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때도 남베트남(월남) 의 국민들은 전쟁 중 정국이 혼란해지자 학생. 학자. 기업인, 종교인, 그리고 정치인과 공무원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집단 시위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북베트남보다 정부를 성토했다. 부정부패가 난무했고 고관대작들과 부유층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정부기관은 물론 군과 경찰. 정보기관에 북베트남의 프락치가 침투해 활개를 쳤다. 심지어는 대통령보좌관도 군 장성도 간첩이었다. 무사안일주의의 정부도 나중에는 간첩 잡는 일을 아예 포기 할 정도가 됐다.

그런 상황이 되다보니 국민들조차 아예 북베트남과 호찌민을 선망하게 되면서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변했다. 결국 남베트남 국민들은 안보체계와 반공의식이 결여되면서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다. 자신들의 무사 안일로 내부의 적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세계 4위의! 공군력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자랑하던 남베트남이 건국 20년 만에 공산당에게 완패됐다.

우리가 6.25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동족상잔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도 이 비극이 청산되지 못해 지금까지도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갈린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우리나라는 현재 정전 상태다. 엄밀히 말한다면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나라다. 내년이면 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가된다.

지금 청소년들이 6.25가 이 땅에서 어떻게 일어났고 경과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이 국가관이 희박하고 6.25전쟁을 더 이상 기억하지도 않고 기억하려고 들지도 않는다는데 있다. 학교에서 이들에게 지식 교육, 입시 위주 교육만 시킬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와 안보교육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과도 바꾸어야 한다. 6.25 전쟁은 흘러간 역사 속 사건이 아니라 현실에 직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핵실험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결의 채택 등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더구나 서해는 북한이 NLL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수시로 영해를 침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실제 북한은 10년 전 6.25 전쟁이후 처음으로 남. 북 간의 제1차 연평해전을 벌린 이후 2002년에도 제2차 연평해전을 잇따라 도발 한데이어 최근까지도 서해상에서 함포사격훈련을 하는 횟수가 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제3의 연평해전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북한은 혁명의 성숙기가 오면 단기 결전으로 남쪽을 적화시킨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화해협력으로 위장한 통일전선술로 남한의 혼란을 끊임없이 획책하려는 전략을 갖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회단체와 일부 정치인과 전직 대통령이 적과의 동침을 원하듯 남북관계가 악화된 책임을 현 정부에 전가하면서 국가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망 말을 하며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데 이로 인해 북한지도부가 혁명의 성숙기가 온 것으로 착각하고 도발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50년 6.25 전쟁 당시보다 우리도 각종 첨단무기를 보유한 만만치 않은 군사강국이 됐지만 베트남을 예로 들었듯 총을 든 적군보다 총은 없지만 내부를 교란시키는 세력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균열을 부추기는 불순 세력에 국민들이 현혹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다행히 최근 국방부장관 등 현 군 수뇌부가 과거 정 부 때와는 달리 북한 도발을 현장에서 종결하라고 전군에 지침을 내리는 등 단호한 도발 억제 의지를 밝힌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그 세월의 무덤덤함에 묻혀 전쟁이 가져다 준 참혹함. 그를 이겨내기 위해 품었던 꿈과 희망,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구성원의 끈끈한 연대감마저 잊혀지는 게 아닌가 싶다.

1.2차 연평해전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북한에 대한 대응태세를 점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모두가 하나가 되는 게 더 중요한 때다 수백만명의 동족과 외국 병사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비극이 또 다시 재현 되지 않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6.25 59주년과 6.29 연평해전 7주년을 맞아 재 다짐 해본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는 글귀가 떠오른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아픈 과거를 통해 교훈과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더 비참한 미래를 맞이 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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