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초파일이 되면 부처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는 대규모의 봉축행사가 불교계 전 종단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이맘때가 되면 각 사찰마다 크고 작은 연등이 걸린다. 등(燈)이란 촛불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태워 어둔 세상을 밝게 해주는 하나의 물건이다.

자신을 태운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빛을 발하며 세상을 밝게 한다는 희생의 의미가 있다. 결국 부처님의 탄신일을 맞이해 불자들이 이처럼 갖가지 모양의 등을 만들어 걸고 대동 한마당이 펼쳐지는 축제의 장을 만드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보다는 그렇게 동참하면서 순간이라도 참회의 시간을 갖고 복을 받기 위함이다.

그런 마음으로 만든 등은 자신은 물론, 타인의 마음까지도 함께 밝아지게 하는 빛을 전함으로써 삼라만상을 밝게 만드는 일로 승화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등을 밝히는 것은 바로 마음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찰에 매달려 있는 등을 보면 크고 작은 것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결국 똑같은 의미로서의 등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에 따라 크기를 구분해 놓은 것을 보면서 속세의 인간들이 부처탄신일을 빌미로 그 분의 참뜻을 왜곡하는 것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든다.

그 같은 등을 보면서 부처님 재세 당시 가난한 여인 난타의 등만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이를 보더라도 등을 밝히는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여인 난타는 좋은 기름을 쓰지도 못했고 또 큰 등을 준비할 형편도 되지 않았지만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홀로 아름답게 빛을 밝혀 크고 작은 물질 이전에 보이지 않는 그 간절한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성경에도 비록 작은 금액이라도, 있는 전부를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 보다 더 큰 축복을 받고 예수님에게 칭찬을 들었다.

아무리 절에 자주 드나들고 불전(佛錢)을 많이 드리고 큰 등을 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마음 속 깊은 곳의 정성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결국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꺼져 버리는 한낱 물질의 등에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원하며 소원 성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같은 바람이 사람 사는 뜻을 거슬리지 말아야 하고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내 것만을 고집하며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면, 아무리 온 가족의 이름을 적은 큰 등을 달아 불을 밝힌들 무슨 은혜가 되겠는가. 단지 외적인 형상이 보이는 것 일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주지 스님의 말씀처럼 필요할 때는 엄청난 능력의 힘을 발휘하고 중생 모두를 살리는 공생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일체(一切)가 다 하나인 근원 자리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인 것이다.

마음이란 체(體)가 없어서 시간, 공간에 구애됨 없이 늘거나 줄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주의 근본이 되어 일체를 싸고 도는 것이며 그 마음 또한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나누며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베풂 속에서도 마음은 차고 넘치게 마련이다.

불안정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며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살다보면 많은 날들을 고통스럽게도, 슬픈 일을 겪을 때도 있다. 이럴 때 주위에서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하면 감사할 것도 없는 세상에서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지나친 탐욕 때문이다. 특히 모든 것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다보니 많은 날들을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게 보내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쉽게 동요하고 쉽게 흔들리며 감정을 표출할 대가 많다. 문제는 신앙을 갖고 있어도 필요이상으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믿음 마저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또한 어려운 일이 닥치면 먼저 염려부터 하면서 인간의 방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과 능력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부족한 인간들은 신앙을 갖게 되고 그 신앙의 믿음으로 자신을 의탁하고 그 믿음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모든 신앙 안에는 사람이 있다. 그 신앙의 믿음 안에서 우리가 꿈을 키우며 비전과 희망을 갖고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픔의 절망을 뛰어 넘어 탐욕을 버리고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향기, 사랑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그런 행복한 삶을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일매일 만들어 가야 한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원했던 내일이다. 찰스 디킨슨은 “지금의 축복을 생각해라. 과거의 불행들을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외쳐보자. 과거야 가라, 절망아, 근심아, 걱정덩어리야 아주 가라. 멀리 멀리 가라. 그리고 다시는 내게 돌아올 생각일랑 하지도 마라”고 말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인생은 한줌의 모래와 같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모래조각 같은 흙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커피는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국처럼 달콤하다며 인생을 한 잔의 커피와 같다고 비교했다.

커피의 향기와 우리 삶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윽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는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고 인생의 모든 맛을 대변해 준다.

특히 필자의 경우 원고를 정리하면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코끝을 스쳐가는 향기와 혀끝으로 느끼는 감미로운 맛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바른 종교와 신앙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생활에 있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 감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의 마음이 만족한 상태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마음속의 기쁨이 넘쳐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감사란 자신의 지루한 삶과 고통을 없애주는 최고의 묘약이고 믿음이며 신앙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바른 신앙이고 믿음이며 어둠을 밝히는 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참 신앙의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 무대에 올라선 삶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주인공인 우리의 삶에 꿈과 사랑을 가득 채우고 나누면 이 세상은 밝고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세상이 될 수 있다.

요즘 같아서는 하루걸러 사월초파일과 성탄절(12월 25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동이 트는 새벽,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을 두는 우리의 신앙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드린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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