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이일은 음력 사월 초팔일로 석가탄신일이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면서 문득 부처님이 최초의 승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왕자 신분인 붓다가 출가하게 된 이유와 수제자 가섭의 염화미소(?華微笑)가 생각났다.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붓다’ 그는 출가의 변을 이렇게 말했다. “재가의 삶은 답답하고 번잡스럽다. 깨끗하지 못한 먼지가 어디든 쌓여있다. 그러나 출가는 드넓은 공간에서 사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머리 깎고 승복을 입었으면 출가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분명히 밝혔다. “(출가는) 답답하고 번잡스런 삶이 아니라 드넓은 공간에 삶” 이라고.

붓다가 말하는 답답하고 번잡스런 곳이 어디인가. 다름 아닌 ‘내 안’ 이다. 집착과 욕망으로 접철된 곳이 어딘가? 바로 ‘나’ 라는 집이다. 그럼 드넓은 공간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그 역시 ‘나’ 라는 집을 허문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하고 번잡스런 나. 그 ‘나’가 실은 ‘허상의 나’ 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출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 깎고 승복을 입고 붉은 장삼을 걸쳤다고 다 출가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를 허물고 드넓은 공간에서 걸림 없는 삶,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 출가라고 붓다는 말했다.

그런 붓다가 2500년 전 영축 산에서 설법을 하면서 꽃을 들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지만 뒤에 서 있던 제자 ‘마하가섭’은 왜 붓다가 꽃을 들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염화미소다.

후세사람들 중 어떤 이는 붓다가 들었던 꽃은 연꽃 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즉 진흙을 뚫고서 올라오는 연꽃의 메시지를 가섭이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 말이 맞을까. 만약 붓다가 다른 꽃을 들었다면 그 때는 어찌되었을까. 필자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그랬어도 가섭은 여전히 미소를 지어보였을 것이다. 이는 붓다가 들었던 꽃은 하나의 꽃이기 이전에 형상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 꽃(형상)을 보라’가 아니라 들고 있는 ‘꽃의 바탕(본질)을 보라’고 한 것이다. 아무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지만 가섭은 그것을 읽고 보았기 때문에 웃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붓다의 꽃과 가섭의 미소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10년 간 불자들과 수행 상담한 것을 ‘기도하면 누가 들어 주나요’ 란 제목으로 책을 펴낸 관음사 주지인 법상 스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수행 상담을 하면서 쉰여덟 주부 불자가 2대 독자인 아들이 여자 친구를 따라 성당에 나가는데 이를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 하자 아들에게 이 말을 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의 마음속에서 ‘반드시’ 불교를 믿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그 마음을 놓아야 하고 그 마음을 놓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다툼과 갈등만이 있을 뿐이라며 어느 종교를 믿는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종교를 믿는다고 다른 종교에 대해 닫혀 있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한 종교에도 올바로 알지 못하는

피조물인 우리는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치 홍역을 치르듯 치러야 하는 것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중에 슬퍼하는 것, 절망스러워 하던 것도 어느 만큼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것들이다. 수도자들만이 고행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을 겪어야 온전한 한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즐기며 감사 할 때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의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모자람이 채워질 때는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넘침에는 불만과 교만만이 따를 뿐이다.

꽃잎에 빗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꽃잎은 한 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아래로 흘려보낸다. 그래서 그 물이 밑에 있는 꽃잎으로 흘러가고 또 연못으로 떨어진다. 이런 자연의 현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꽃잎이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담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버리면서 나누고 베푼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욕심만 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어느 광고 카피를 보니 일생동안 웃는 시간이 21일에 불과한 504시간이란다. 통계상 그렇다는 것인데 평균 56만8900시간을 산다고 쳐도 너무 한 게 아닌가 싶다. 왜 그런 것일까. 이처럼 즐거운 시간이 5백여 시간에 불과 한 것은 그 만큼 우리 안에 탐욕의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도자들이 속세를 떠나서도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탐욕의 짐을 짊어지지 않아서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무리들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런 빈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벼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모두가 탐심 때문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땅에 사는 어느 사람이라도 물질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가 갖는 탐욕은 마치 바닷물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갖고 싶을 정도로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질을 통해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어리석음의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세상에 내려 보낸 이유가 있다면 누구나 사랑하나 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함이요. 또 인간을 빈손으로 또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는 이유도 한 평생 움켜쥐고 있던 그 많은 것들 중 가지고 갈 것은 오직 사랑 밖에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분명한 것은 선(善) 함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종교행위다. 왜냐하면 삶은 누구에게나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통해 각자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와 희생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도 훌륭한 어찌 보면 종교 행위라 할 수 있다.

단 하루의 아침해를 맞이하고 떠나보내면서 어떤 마음의 색깔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보자. 이제 석가탄신의 날을 계기로 깨끗한 타월로 걸려 있지 말고 걸레가 되자. 걸레의 경우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보면 비천하기 짝이 없지만 내면적 안목에서 보면 거룩하기 그지없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 자신은 찢기고 쥐어 짜이며 살을 헐어야 하는 아픔을 느껴야만 하지만 깨끗함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희생적인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것이 신앙을 실천하는 종교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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