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젊은 연예인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자식을 가진 부모 입장에서, 또 사회인이자 목사로서 마음이 몹시 착잡하기만 하다. 더구나 자살과 관련한 소식들이 연일 보도되는 방송에서 보여준 밝은 모습과는 달리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행복해 보이던 표정에도 마음은 죽을 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악글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성(性)접대’ 까지 강요받았다니 젊은 여자가, 그 삶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닐 정도로 힘이 들었을 것 같다. 그랬어도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며 인생을 연극무대에 올라온 배우처럼 ‘나 아닌 나’로 살아왔을 그 모습에 가슴이 저려온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두 길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행복의 길이고 또 하나는 불행의 길이다. 이 길은 세상이 변해도 예나 지금이나 늘 마찬가지다. 만들어진 길로 사람들이 다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다보니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쩜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만 되는 게 아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이는 행복의 나래를 타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이는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불확실한 삶 속에서 여러 가지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지식을 통해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찾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간다. 다시는 불행의 길은 걷지 않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때로는 타인의 삶을 거울삼아 삶에 대한 지혜를 터득하기도 한다.

과연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삶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고 또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검소한 생활과 근면한 생활을 통해 미래를 개척하며 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같은 사람의 경우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자신감을 갖고 있고 늘 희망이 있으며, 이웃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꿈과 희망이 있는 얼굴은 늘 밝고 맑은 모습으로 행복의 미소가 넘쳐나지만 꿈이 없고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지어져 있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는 이스터린 역설(Easterlin Paradox) 말이다. 부자로 만들어 준다던 펀드는 반 토막만 남았어도 안도의 숨을 내쉴 형편이고 달랑 하나 있는 아파트는 대출이자만 남긴 채 속절없이 날아가고, 미국에서 건너 온 금융위기는 미국의 도움으로 다소 진정국면에 들어섰지만 그 보다 차가운 실물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니 올 봄도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엔 아직 이른 것같은 감이 든다.

요즘 경기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자살예방센터 전화기가 불이 날 정도로 울리면서 센터가 부쩍 바빠졌다. 월 20회 출동, 자살 미수자들을 설득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라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 지난 해 같은 기간 비례해 35%가 늘어났다고 한다. 특히 연예인 자살이 보도될 경우 상담이 급증한다고도 했다. 한국의 경우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는 2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

자살. 오죽 했으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심정을 백 번 천 번, 이해하더라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고통을 이겨낼 힘도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살을 한 번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칼로 손목을 긋거나 올가미로 목을 맸다가, 약을 먹으려다, 강물에 빠지려다, 차마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수에 그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당시에는 죽음 밖에는 더 이상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살아 생각하면 아찔하고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자살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비겁함이요 현실도피이자 살인자다.

자살(Suicide)의 어원은 라틴어 Sui(자기 자신) 와 Caedo(죽이다)의 합성어다. ‘내가 그냥 사라지는 것’ 이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살인이다. 남을 죽여서 그 가정을 파괴시키는 것이나 나를 죽여서 내 가정을 파괴시키는 게 얼마나 다를까. 자살은 무책임이다. 나는 죽음으로서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하지만 남은 가족들의 고통은 어찌하고 그 보상을 받는단 말인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쉬운 게 하나도 없고 모두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눈물이 있다. 그곳엔 슬픔이 있고 아픔과 고통과 절망과 이별이 숨어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눈물에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용서가 담겨있다. 그래서 눈물은 슬픔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안다. 눈물은 우리 영혼의 창을 말끔하게 씻어내는 치유의 빗물이다.

필자도 IMF때 보증을 잘못 서 준 탓에 1억 대의 변상문제로 차압, 경매 쪽지가 날아오면서 D-데이를 정하고 자살을 계획한 적도 있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더니 오늘에 이르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자살자도 할 말은 있다. 그러나 내가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흔히 자살자들을 보면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모른다.’ 라든지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괴롭힌다.’고 세상을 탓하거나 사람들을 원망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자위의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아무리 못 먹고 못 입고 힘들게 산다 해도 과거 나라님 보다 더 윤택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 당시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이렇게 승용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타 볼 수가 있었겠는가. 아울러 클릭만 하면 모든 정보를 한 순간에 쉽게 볼 수 있는 인터넷을 생각이나 해 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철지나 임금도 맘대로 먹을 수 없었던 과일을 지금은 계절에 관계없이 먹는 내가 아닌가. 임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는 나를 불행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면 이렇다. 행복은 소비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 한다. 소비는 효용체감이 적용되는 만큼 욕망을 줄이는 것이 행복을 최대로 키우는 방법이다. 한 마디로 분수에 맞는 건전한 소비를 하면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만족하는 삶을 살면 행복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자살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추운 겨울나기의 해법이며 사회 전체로도 불황의 터널을 더 빨리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

자동차 옆에 달린 백미러에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라는 글귀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행복은 생각하는 것 보다 내 곁에 가까이 있다.’ ‘ 기회는 항상 내가 생각하는 곳 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훨씬 더 좋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이승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서양에도 Better a live coward thana dead hero(죽은 영웅보다 살아있는 겁쟁이가 낫다.)라는 말이 있다.

생명은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귀중한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무조건 살고 보자. 몇 년 후 고난을 이기고 목표에 다 달았을 때 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땐 정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고 웃으며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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