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좋은 나라?

고대 로마가 극도로 혼란했을 때 한 어머니가 정치인이 되려는 아들을 극구 만류했다.

“네가 정직하면 사람들에 의해서 상처를 입고, 부정직하면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든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니 너는 그런 정치판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정치를 꼭 하고 싶었던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들이 말하기를 “제가 정직하면 신의 노여움도 피할 수 있고, 부정직하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서로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결국 어느 쪽이든 상처 받을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언뜻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모자간이지만 이처럼 하나의 사안을 놓고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머니의 경우는 부정적인 부문만을, 아들은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어머니는 아들의 계획을 막으려 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들은 자기의 꿈을 관철하고자 했다. 설령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일도 결국 내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해석도 분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법부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면서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발단은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으로 있던 지난해 촛불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재판과 관련, 이를 담당한 판사들에게 ‘통상적 방법으로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려달라’고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부터다.

이를 두고 법원 일각에서 ‘판사들에 대한 압력 행사’로 몰아 부치면서 진상조사단이 구성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시위참가자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도록 유도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 월권이고, 부당한 압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사법행정을 지휘, 감독하는 지법원장이 직무상 재판이 지연되는 사태를 우려해 신속한 재판을 하도록 직무를 수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대한민국의 판사들이 그렇게 압력에 흔들리는 법관들인가 하는 것이다.

모자간이라도 똑같은 사안에 대해 견해차이를 보이듯 이 문제도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 같이 소란스럽지도 않고 진상조사단도 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 대법관은 지난해 형사단독 판사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법 소속 판사 300여명에게도 장기 미제사건을 남기지 말라는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조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촛불시위 사건에 대해서 행정처장을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진상조사단이 구성될 정도의 중요 사안이냐 하는 것이다.

신 대법관을 두둔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다만 몇몇 사람의 불만이 마치 법원 전체의 입장인 것처럼 표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참여연대와 일부 사회단체가 “대법원은 진상조사가 부실했던 점을 인정하고 국회와 재야 법조계, 시민단체 등으로 조사위를 구성해야 한다”며 심지어는 사실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법관 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법관을 불신하고 재판에 압력을 주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론을 너무 의식하는 판사들까지도 이런 압력에 굴복,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무언의 압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안이 민감한 촛불시위 사건이라 시민단체가 더욱 촉각을 내세우며 보는 측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만약 일반 민사사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법원장에게 주어진 직무를 놓고 이를 너무 크게 확산시키며 여론몰이로 2명의 경찰청 총수에 이어 또 다른 희생자가 정치적인 제물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이번에 구성된 조사단의 핵심은 신 대법관이 판사들에게 재판과 관련, 압력을 넣으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사실관계 법리적 판단이 되어야 하는데 자칫 여론에 휘말려 한쪽으로 치우쳐질까 하는 것이다.

이는 파문의 시초가 된 촛불시위와 집시법 등에 대해서 똑같은 판사라도 세대에 따라 시각이 첨예하게 갈려있는 시점에서 조사단 구성원이 어떤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이번 조사단이 냉정함 속에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진행시켜 사법권이 실추되고 법관들을 불신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한다. 더구나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그 누구도 법관의 직무에 대해 간섭하거나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법관의 존엄성과 명예를 위해서도 그렇다.

촛불은 스스로 빛을 갖고 있지 않다. 누군가가 불을 붙여줄 때 비로소 빛으로 탈 수 있다. 그래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는 것이다. 초는 타면서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촛불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주위를 밝게 비친다는 점에서 희생을, 약한 바람에 꺼지면서도 함께 모이면 세상을 채운다는 점에서 결집을, 어둠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새벽을 기다리는 불꽃이 되는 점에서 꿈과 기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촛불시위가 이 희생정신과 응집력과 소망을 담아내어 세상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지난해 여름 청계광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시위와 재미를 하나로 묶어 집단적으로 향유했던 촛불시위. 다수의 시민들이 바라던 아름다운 문화축제로 승화되기 보다는 이를 계기로 일부 재야세력과 반정부세력들,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이 이명박 정부를 까부수는 호재의 기회가 되면서 치안부재를 가져왔다.

그런 촛불시위가 해를 넘긴 국회 파행의 원인(遠因)의 불씨로 남아 있다. 쟁점법안, 이념법안이란 것들 모두가 촛불과 관련 되어 있다. 시위 중 복면을 쓰지 못하게 하자는 법안, 시위피해에 대한 집단소송을 하자는 법안,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하자는 법안 등이 모두 다 촛불시위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여름 촛불피해액은 3조7천억원이라 했다. 어쩜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까지 따진다면 이 피해액은 더 늘어난 수치일 수도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촛불이 다시 켜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걱정되는 촛불의 계기가 실업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업자가 3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대개의 경우 시위자들의 분노에는 실업의 불만이 상당수 깔려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언론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북한 안내원의 말이 떠오른다. “왜 미국놈들이 못먹는 소를 남한에 팔게 해서 그 위험을 알고 이를 막으려는 애국시민들을 가둬 두느냐, 그런 횡포를 하는 이명박과 경찰청장은 당연히 파면시켜야 한다”

자칫 우리의 뜻과는 달리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를 하는 것 같아 온몸이 오싹해진다. 그런 촛불시위, 올해는 정말이지 다시는 거리에서 그런 촛불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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