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아픔도 가슴에 묻어두어야겠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공연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현실이 차가워지고 각박해 진 것 또한 사실이다.

자기 것 챙기기도 바쁘고 조금이라도 남에게 뒤처진다 싶으면 낙오자라도 된 듯한 강박관념으로 사는 세상이다.

어쩌다 이 세상이 이리 소란스럽고 시끄러워졌는지, 그리고 왜 미움과 다툼이 생기고 남의 가슴에 상처를 안겨 주기까지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너와 내가 서로를 잘 모르고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겉보기와 다른 이면을 갖고 있지만 이를 알아채는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모두가 다 세상을 걱정하고 진리와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도 없고 부처처럼 뼈만 앙상히 남도록 명상하고 깨우치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이 이 땅에는 온통 예수와 부처에 편승하여 자신의 부(富)와 명예만을 위해 혈안이 된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도 ~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 창조주가 우리 인간에게 영성을 준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우주 만물을 지배하라는 삼대축복(三大祝福)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양한 시각(視角)으로 현실을 살펴보며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길,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다면 이 세상은 사뭇 달라질 수도 있다.

남이 선행을 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수희(隨喜)라고 한다. 수희는 단순히 남의 행함을 기뻐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아들이 귀중한 보석을 잃어버렸다 찾았을 때 아버지가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것과 같은 마음을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는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 보다 질투하거나 비교하는 마음 없이 수희하는 것이 가장 큰 공덕(公德)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그만’ 이라는 식으로 남에게 아픈 상처를 주는 비난의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선행을 행한 사람에게 조차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는 편견에서 상대를 곡해하며 악의적으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남에게 악담을 퍼붓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광대무변한 자리다. 그래서 좋게 생각하면 좋은 마음이 되고 나쁘게 생각하면 나쁜 생각이 들어 앉아 있는 힘을 배출해내는 거대한 에너지 저장소다.

오직 나는 내 생각대로 살 뿐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문제겠지만 이 모든 물질을 이루어낸 그 바탕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의 근본 자리는 ‘선’이나 ‘악’의 경계가 없는 자리였지만 우리들의 생각이 모든 것을 ‘악’으로, 또는 ‘선’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마음을 어디에다 둬야 하겠는가. “나는 보이는 것, 듣는 것만 믿어” 라고 한다면 이세상의 50%를 간과하고 사는

삼대축복을 받은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業)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몇 cm의 거리에 불과하지만 마음에 거리는 한강과 태평양 바다만큼 멀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음파는 거리에 상관없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니 업의 부메랑효과(Boomerang effect)가 바로 그것이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희란 공덕은 다음 생(生)에 귀한 몸을 얻는 것에서부터 깨달음을 얻은 길에 이르기까지 큰 도움이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만큼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오는 반대급부 또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쏟아내고 싶은 나의 감정들은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또 달라지는 마음이 된다. 흙으로 빚어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고 또 다양한 층위(層位)로 이뤄졌던가? 너무 차갑게 앞 시대를 재단하고 칼질을 해된다. 그걸 인간의 마음으로서 따뜻하게 보듬으며 어울러 줄 수는 없었을까.

필자가 출강하는 K대학은 타 대학과는 달리 기술사를 양성하는 곳이라 학생들의 연령층이 천태만상이라 교육의 기준을 두기가 어렵다. 그래서 힘들다. 좋은 마음을 갖고 있는 다수는 침묵하는데 반해 나쁜 마음을 갖고 있는 소수의 목소리는 밖으로 크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여년의 ‘장병고충처리 상담 관’ 및 ‘청소년선도’, 4년의 ‘경찰청 경목, ‘법무부 범죄예방위원’으로 보호감찰대상을지도 한 경험을 통해 인간 교육을 실시해왔다.

이와 함께 상담실을 운영하고 또 신우회원을 대상으로 주 1회 예배를 드린다. 이 같은 열의는 내 딸이 이 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더 더욱 애정을 갖고 교사가 아닌 부모의 마음에서다. 또 사회 환원 차원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려는 하지 못할망정 일부 학과교수가 자체적으로 사회윤리교육을 실시하겠다며 전문 강사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한다.

태산(太山)은 보지 않고 작은티끌을 보며 평가를 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의 그물에 빠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상처를 입히는 그릇된 삶을 살고있다. 현명한 학장님의 판단으로 무산 됐지만 윤리학을 가볍게 여기는 이런 대학이 과연 인성교육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또 다른 B대학의 경우 학과장이 겸직을 하지않고 전문영역은 강사를 채용하되 오히려 과의 성향분석을 한 자료를 제공하며 적절한 강의를 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 한 가지를 보아도 비교가 된다. 내가 지금 이 시간 고뇌하며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결국 내 오만함으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원망과 미움의 아픔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내 가슴에 담겨있는 돌들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

비록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일지라도 그래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니 그게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증오는 증오에 의해서 결코 무너뜨릴 수 있는데 복수에서의 승리는 또 다른 증오를 남기게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말라. 내가 나를 알아주면 된다"는 공자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리고 24전24승을 거두고도 공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한 불멸의 이순신 장군의 성품을 생각해보았다. 묻고 싶다. 거짓된 마음에 이끌려 본마음과는 달리 이리저리 요동치면서 살아왔던 세월은 지금까지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정말 소중한 삶, 적어도 가족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서 진짜 삶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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