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비방을 받는 사람은 한 번 비방을 받은 때마다 자기를 성찰하여 그릇됨을 바로 잡고 내면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복 받을 수 없겠지만, 속임을 당하는 사람은 속을 때마다 도량을 키워 전화위복이 되게 한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며칠 전 우리는 뜻하지 않은 참사로 많은 인명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당연히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을 위로하고, 향후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치권에서는 애도에 앞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사망자’ ‘희생자’ ‘참사’ ‘사고’ 명칭을 두고도 싸움질을 하면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특히 국회의원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남 탓만 한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짧은 시월의 마지막 밤이 길기만한 것 같다. 감히 말 하건데, 남 탓이란 없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남이 아닌 바로 나인데 내 탓이지 왜 남의 탓이란 말인가. 오래 전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캠페인을 벌리면서 자동차 뒷 유리창에 이문구를 부착하고 다닌 던 때가 생각난다. 그 당시 필자는 막연히 편하게만 생각했다. ‘맞아, 그저 내 탓으로 돌리면 그게 마음 편한 게지.’ 그러나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틀린 것 같다. 마음 편 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 습관의 거울이고, 타인은 내 행위의 거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천명을 보고 느낀다. 타인은 나의 주체성을 깨우쳐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숲의 나무들은 서로 연대하면서 바람과 한기(寒氣)에 맞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각자가 모두 올곧게 서 있다. ‘특히 소나무들은 빽빽이 살지만 옆의 나무가 가지를 낸 쪽으로는 가지를 키우지 않는다.’ 고도 했다. 상대에 대한 배려다. 공자는 “군자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 법” 이라는 가르침을 줬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으로써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에 큰 재난이 났을 때 사람들은 그 탓을 할 희생양부터 찾는데, 보편적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의 잘못으로, 또 하나는 희생자들의 잘못으로 탓을 돌리려고 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지만, 이태원 참사는 사전에 정확한 예측 시나리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줄일 수 있었던 피해를 줄이지 못했음으로 참사(慘事)라기 보다는 인재(人災)라 할 수 있다.

당연히 희생자들은 말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동정하면서도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반응들도 예외는 아니다. 언론사들의 경쟁 속에 근거 없는 속보와 자극적인 뉴스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과 놀다가 죽은 사람들을 어찌 비교하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거기에 왜 갔냐.” “일하다 죽은 게 아니라 놀려고 하다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애도 기간까지 가져야 하나.” 라는 말들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 적지 않게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도하고 놀기도 한다. 게다가 놀이야말로 인류문화의 기원이고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왜 국적불명의 귀신 명절을 지내다 이렇게 되었느냐?” 라는 핼러윈 탓도 나온다. 국적 불명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인 명절이다.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발달시킨 명절이다. 그런 명절을 한국에서도 받아드린 것이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분장을 하고 거리로 나오는 게 나쁜 것인가. 단지 귀신놀이로만 보고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볼거리가 많은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처럼 나왔을 뿐이다.

이번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156명이라는 비극적인 숫자 속에 외국인이 무려 14개국 26명에 다한다. 이는 이태원 자체가 전통적인 다문화 거리이기도 하지만, 한국화된 이태원 핼러윈 축제가 국제적인 문화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유튜버들이 사고 직전에 찍은 동영상을 보면 무척 정교하고, 창의적인 분장을 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누가 그런 축제가 재앙과 비극이 될 줄 알면서도 가겠는가. 애도기간이 이미 끝났지만, 아픈 마음은 여전하다. 대부분의 국민들 마음이 그럴 진데, 대장동 건으로 궁지에 몰린 민주당이 마치 호재를 만난 것처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 선동을 하려는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 해주고 있다.

흔히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菽麥)이라 한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연히 다른 곡식(穀食)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도 분별(分別)하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쑥맥!’ 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숙맥(菽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상식(常識)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 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問題)는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해’를 보고 ‘달’ 이라 하고, ‘달’ 을 보고 ‘해’ 라고 우긴다면,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事態)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 되고, 변명이 사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숙맥의 시대라 하고, 이런 시대를 숙맥(菽麥)의 난(亂)이라고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숙맥의 난맥상은 그 어떤 혼란의 시대보다 폐해가 크다. 상식은 몰락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도술(道術)이 성행한다. 이런 도술을 부리며 세상 사람들을 흘리는 도사들이 숙맥(菽麥)의 시대에는 주류가 된다.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 능력(能力)으로 인정된다. 숙맥 고 교주들은 분별력을 잃은 숙맥들을 이끌고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말로 사람들을 부추키고 선동하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긴다. 이미 좀비가 된 대한민국 숙맥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교주(敎主)의 구호에 맞춰 절규하고 거품을 물고 욕(慾)을 해 댄다. 이념(理念)이 사람을 잡아먹고, 관념(觀念)이 현실을 가린 숙맥의 난이 펼쳐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인류(人類)의 역사는 늘 숙맥의 난(亂)으로 들끓었다.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숙맥의 난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숙(寂)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숙맥의 시대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權力)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며, 제 몸을 가를 칼춤을 추고 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區別)하지 못하는 숙맥(菽麥)의 세상(世上)을 침묵파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민주당이 콩과 보리를 구별할 줄 모르는 숙맥으로 비춰진다. 앞에선 추모를, 뒤로는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민주당의 이중성, 국민은 속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들의 애도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행안부 장관까지는 날려야 한다, 내각 총사퇴까지 거론해야 한다,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셈법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바쁜 민주당. 이번 이태원 참사가 용산 대통령실 이전에 따른 경찰력 공백 때문이다, 현 정부의 마약 수사로 인해 안전 유지 인력이 없었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현 정부 때리기에 총력을 다 하고 있다. 한 술 더 떠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이태원 참사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석고 대죄해야 한다고 했다. 언제까지 선동으로 권력을 취하고 무능을 감추려고 하는가?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은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민주당 박찬대 최고위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살아있었더라면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글을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며 사고 희생자들을 농락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겉으로는 추모를 외치며 뒤로는 대통령 탄핵을 속삭이는 촛불집회에 민주당 조직이 동원됐다는 의혹도 터져 나왔다. 민주당은 애도와 추모의 시간을 정쟁으로 더럽히고 있다. 아픔을 같이 하기 이전에 ‘사고 팔이, 정쟁몰이’ 에만 몰두하며 남을 탓하고 있다. 민주당만큼은 남 탓을 할 수 없다. 한 예로 2014년.10월 경기도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축제장 부근의 지하로 연결된 환풍구가 붕괴되면서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이 추락하여 16명이 사망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지만, 혼잡경비나 112신고 미흡으로 경찰청장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때 행사를 주체했던 산하기관 오모과장은 자살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쿠팡 물류센터 대형 화재 시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주었던 소방대장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 이재명은 창원에서 황교익이랑 먹방 촬영중이였다. ‘화재 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재명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문재인도 마찬가지다. 문재인의 정부 시절 강원도 산불 등 많은 악재가 발생했어도, 누구하나 문 정부를 탓하거나, 문재인 탄핵을 말하지 않았다. 특히 문재인은 세월호 사건 때 왜 희생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을까? 그리고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게 세월 호 선주인 유병언의 집이 어떤 과정에서 문재인의 집이 되었는지, 지금까지도 그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 이태원 참사의 경우, 주최자 없는 군중의 모임을 어떻게 제어하고 압사사고를 방지할지에 대한 매뉴얼 자체가 그간 없었다. 많은 재해, 인재를 겪었으면서도 재난 방지대책 마련을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남 탓만을 하는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어야 한다. 아울러 당일에 압사가능성 신고가 수차례 들어왔음에도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등 여러 문제를 수사를 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처벌하고, 조리돌림 하는 게 아니라 수습을 하고 매뉴얼과 시스템을 구성, 재발방지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선동과 분열의 시간이 아니라 치유와 반성의 시간이다. 민주당은 차라리 이참에 검찰 수사에나 성실히 임하기를 바란다. 국민은 슬픔을 정쟁으로 만들려는 민주당을 지켜보기 안타깝다. “6개월밖에 안된 새 정부를 탄핵하겠다고 퇴진운동을 선동하는 세력들과 이태원 대참사를 정쟁으로 몰고 가려는 세력들이 있다면 현명한 국민들은 반드시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더 이상 국민들은 거기에 선동당해서는 안 된다. 천명의 주체성을 일찍이 터득한 나무들은 남 탓(태풍 탓)을 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내 탓이오”를 나직이 말해보자.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 해도 어떤 가. 그것 역시 내 탓인 것을. 마이클 브린(Michael Breen)전 외신기자협회장은 ‘한국 민주주의는 법(法)이 아닌 야수(野獸)가 된 인민(人民)이 지배한다.’ 며 '한국은 민심(여론조사, 與論調査)에 따라 정권의 운명(運命)이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과연 민심이 정의일까? 최근 설문조사에서도 1000명에게 의뢰했는데, 응답 율은 10%대. 그 중에 절반이 윤 정부를 부정했다. 과연 그런 평가가 제대로 된 평가라 할 수 있을까?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고소 고발을 남발하는 민주당은 패륜정치의 종말을 위해 가장 먼저 결자해지 해주시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부탁한다.

[호 심송, 한국 열린 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특임교수, 전, YTN – 저널 편집위원 & 의학전문대기자, 전, 수도방위사령부 장병고충처리 상담 관(군목), 현, 법무부 청소년선도위원회 상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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