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예전에 사이좋은 네 마리 황소가 있었다.

어딜 가든지 함께 다니고 좋은 풀밭을 만나면 절대로 먼저 나서지 않고 함께 사이좋게 풀을 뜯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힘을 모아 함께 헤쳐나갔다.

그런 황소들을 잡아먹기 위해 노리는 사자가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백수의 왕 사자라 할지라도 네 마리의 황소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황소를 잡아먹을 궁리를 하던 사자는 풀을 뜯다가 다른 세 마리에게서 조금 뒤처진 황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놀란 한 마리 황소가 친구들에게 뛰어가려는 데 사자가 조용히 말했다.

"다른 황소들이 그러는데 너 혼자만 풀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흉을 보더라." 그런 식으로 사자는 다른 황소들에게도 거짓말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사자의 거짓말에 사이가 뒤틀어진 황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되면서 사자가 바라는 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결국 차례대로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또 중국의 한 예를 들고자 한다.

‘관포지교(管鮑之交)’ 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살던 '관중'과 '포숙'이라는 두 사람은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이 젊은 시절 같이 장사 할 때 항상 관중이 더 많은 이익금을 가져갔다.

그러나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더 어렵고 돌봐야 할 식구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제나라의 관리가 되었지만, 관중은 세 번이나 파면되었다.

그 이유는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관중으로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혼자 남게 되는 늙은 홀어머니가 걱정되어 전쟁터에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같이 관중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포숙은 여러 사정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친구 관중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자신이 모시던 군주 소백에게 관중을 천거했다.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신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를 등용해 쓰십시오." 그렇게 관중은 소백의 재상이 되었고, 이후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은 소백은 제나라 환공에 올라 춘추 5패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관중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아자부모(生我者父母), 지아자포숙아야(知我者鮑叔兒也)’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과 관중처럼 자신의 약한 모습을 부끄럼 없이 편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친구. 내가 힘들고 괴로운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친구. 한평생 이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정도로 좋은 친구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런 친구를 찾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다른 친구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준다면 그 친구도 당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지난 13일 노모가 사는 아파트에서 투신 사망(?)한 정의당 노희찬 원내대표는 지난해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자 국회 의원회관에서 잔치국수를 먹는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바 있다.

당시 노 원내대표는 "잔치국수 드디어 먹었다. 오늘 점심 못 드시는 분 몫까지 2인분 먹었다.

매년 3월 10일을 촛불 시민혁명기념일 지정하고 잔치국수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적었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반대와 무죄석방 요구에 앞장서 온 정미홍 전 대한 애국당 사무총장(전 KBS 아나운서)도 지병인 ‘암’으로 투병 중에 지난 25일 새벽 운명을 달리했다.

고인은 운명 직전 '내가 너무 예민했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는데' '관대하라'고 말했다"고 지인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고 한다.

정치계를 보면 네 마리의 황소와 사자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포숙과 관중 같은 인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만큼 정치판은 매몰차고 비정하다는 것을 인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 노희찬 정의당 원내대표 빈소에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조화를 보내고, 조문하는 등,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안타까워했다.

또 작가 유시민과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은 빈소에서 오열까지 하면서 고인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촉촉하게 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그렇게 애도를 하고, 고인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왜 살아생전에는 그런 배려와 관심의 마음을 갖지 못하고 서로가 미움과 비난으로 보내야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하는 지, 고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하며 애도를 표하는 두 얼굴의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순직한 국군 장병 빈소와는 달리 줄을 잇는 조문객과 조화들, 애석하지만 특별한 공적 없이 '국회장'으로 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또한 장례위원까지도 모집을 한다고 한다.

언론과 정치권이 노 의원의 사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용히 떠나보내는 것이 고인이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전 기자 생활을 함께했던 동료의 빈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 대인관계가 별로 없어선지 아니면 퇴직을 한 후라 그런지 조문객이 없는 빈소는 설렁하기만 했다.

빈소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불현듯 눈물이 쏟아지며 오열을 해, 유가족들이 오히려 위로 할 정도였다.

고인이 된 동료, 마음은 아팠지만 그럴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직장에서 함께한 고인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자를 중상모략하고, 비방하면서 무척 힘들게 했던 분이다.

그로 인해 상처도 깊었고, 치욕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회장이 새로 선출되고, 무능한 그 동료가 1차로 해직처분을 받았을 때도, 노조보다 먼저 신임회장에게 잘못된 인사에 대해 지적을 하며, 그 동료를 감쌌던 필자다.

그렇게도 욕심이 많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동료이기에 약 오르고 원망스러움에 눈물이 쏟아진 것뿐이다.

그러나 유가족들과 조문객은 좋은 친구로서 진정한 슬픔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서로에게 단단한 신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불신이 심어지기는 생각보다 오히려 쉽고 빠르다.

작은 균열이 탑을 무너뜨리고 강둑의 작은 구멍이 마을을 삼킨다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일상은 순간일 때가 많다. 시간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순간과 순간이 이어진 것뿐이다.

그 순간을 위해 모두는 열정을 쏟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지나면 작은 점으로 사라진다.

점(點) 같은 순간은, 닿자마자 물이 빠지는 것과 같다.

순간적으로 흔적은 느끼지만 모든 것이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지나간 후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욕심을 내도 남의 마음은 아프게 하지 말고 살자 “좋은 친구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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