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으로 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2017년의 한 해가 서녘으로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삼 일 후면 닭띠인 정유년이 가고, 황금 개띠인 무술년 새해가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맘때면 늘 그랬듯이 뿌듯함보다는 뭔가 아쉬움이 더 크다.

돌이켜보면 무엇하나 변변하게 이뤄 놓은 게 없다. 의욕만 앞섰지 행동이 받쳐주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며 후회를 한다.

그런 삶을 우리는 늘 되풀이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한다. 이 격변의 한 해를 떠나보내고, 신년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드는 가장 큰 느낌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말로는 새해라고 하지만 사실 몇 초의 시간차로 지난해, 새해로 나눠질 뿐이다.

어제 뜨고 지던 ‘해’와 ‘달’은 오늘도 똑같이 뜨고 지는데, 우습게도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지난해를 돌이켜보며 반성을 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으며 각오를 다지기도 한다.

하루하루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모른 채, 12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또 맞이하지도 못할 새로운 한 해를 그리며 희망의 꿈을 꾼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계획하기에 앞서 지난 한 해 동안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오해는 없었는지를 뒤집어보며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먼저 용서를 빌고, 오해를 했으면 먼저 화해를 한 후에,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최근에 필자가 모 동문회에서 오해를 받고 아주 나쁜 사람이 된 것을 한 동문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분명 전달하는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왜곡해서 전달한 것 같다.

반면 문제를 크게 만들어 사업을 빨리 진행시키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어쩜 필자가 싫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 나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도 미운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미물에 불과한 자를 싫어하고 질시하는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사람들의 심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을 칭찬하기보다, 남을 흉보는 것을 더 즐긴다. 지금은 남을 험담하고 헐뜯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되돌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미래의 청사진을 펼치기 전 먼저 매듭이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면 이 해가 가기 전 반드시 풀고 가야 한다.

한 해를 보내면서 풀고 가지 않는다면 훗날 아주 풀기 힘든 상처의 아픔이 될 수도 있다. 설령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다 해도, 예수의 억울함과 아픔만큼이나 하겠는가.

이미 흘러간 2017년 정유년 한 해처럼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무술년 개띠 한해의 날들은 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를 생각해 보자. 굳이 한 가지를 더 지적하자면 우리는 주위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무척 애쓰며 힘들어한다.

마치 주위에 널려있는 행복의 세잎 크로바는 제쳐두고 행운의 네잎 크로바를 찾아 헤매듯 한다.

좋은 사람을 찾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른다.

정말 소중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늘 배려해주고 따뜻한 정을 나누며 잊히지 않는 그리운 사람이 될 것이다.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지만, 언젠가는 이별을 하게 된다. 떠난 후에라도 남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 좋은 기억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아, 그때,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어.” 라는 소리를 듣고, 기억에 남는 그런 그리운 사람이 되어져야 한다. 엊그제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이다.

성탄의 본질은 용서와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 이해를 먼저하고, 사랑받기보다는 헌신의 사랑을 먼저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용서함으로 용서받으며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는 것과 져주는 것은 전혀 의미가 사뭇 다르다. 지는 것은 힘이 없어서 지는 것이지만, 져 주는 것은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양보하는 것이다.

동문회 사건도 그렇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실을 규명해서 이겨본들 서로 간에 상처만 남게 된다. 그래서 너그럽게 져주고 싶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문득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고, 로마병정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모습이 떠오른다.

왜 그처럼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처참한 죽음을 스스로 맞이했을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져줌으로서 영원한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것이 완전한 패배로 보였지만 삼 일 후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사랑으로 져 주는 것이 영원히 이기는 것임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셨다.

우리도 새해에는 그분의 고귀한 사랑과 인내와 용서와 관용을 배워 실천했으면 한다. 현대 사회에 예수처럼 사랑으로 져주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평화롭고 안정된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70여 년을 살아온 길. 뒤돌아보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련만, 기억되어지는 추억은 고작 ‘몇십 분’(分)에 불과하다. 참으로 허무하다.

오래 살았다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 세월에 비해 기억되어지는 것이 너무도 짧기만 하다.

날씨가 점차 쌀쌀해지면서 살림살이에 찌든 서민들은 더 춥고 어둡다. 아직도 채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은데, 그냥 빈 수레로 시간은 무심하게 내달리고만 있다.

시간과 함께 스쳐 가는 그림자 같은 인생이다,

무술년의 해인 내년에는 문풍(文風)바람이 휘몰아친 뒤 실시되는 지방선거까지 맞물러 있는 해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과 베품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는 무술년 대운(大運)의 빛이 한반도에 깃들기를 기대해본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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