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실의 발견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누에는 사람이 주는 뽕을 열심히 먹고 자라서 누에고치를 짓습니다. 사람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어 의복을 만들어 입고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처음으로 뽑게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날 중국 문화의 창시자이며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첫 번째 제(帝)로 알려진 황제(黃帝)가 살고 있었습니다. 황제(黃帝)는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황제는 세상에 태어나서 생후 70일 이전인 갓난아기 때에 말을 할 수 있었고 유년시절에 지혜가 넓어 박식하고 사유함과 리치를 이해함이 빨랐습니다.

황제의 성은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 헌원(軒轅)의 언덕에 수도를 세웠다고 하여 헌원 황제라고도 합니다.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여지지(輿地志)에는 탁록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는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이며 소전국(少典國)의 차자입니다.

호(號)는 유웅씨(有熊氏), 진운씨(縉雲氏), 제홍씨(帝鴻氏) 그리고 제헌씨(帝軒氏)라고 합니다. 어머니 부보(附寶)가 기야(祁野)에 갔을 때 큰 번개가 북두(北斗)의 추성(樞星)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는 그에 감응하여 잉태하게 되었고 24개월 만에 황제를 수구(壽丘)에서 낳았다고 합니다.

수구는 노(魯)나라 동문 북쪽 있으며, 지금의 연주(兗州) 곡부현(曲阜縣) 동북쪽 6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태어날 때 이마 왼쪽에 두둑한 뼈가 생겼고 용과 같은 얼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붉은 흙의 땅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황제라고 한 것입니다.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났으며 희수(姬水)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을 희(姬)라고 한 것이며 헌원(軒轅)에 살았기 때문에 헌원이라 하고 호(號)로도 삼은 것입니다.

황제가 수산(首山)에서 구리를 채취하여 형산(荊山)아래서 솥을 주조하는데 솥이 이미 완성되자 어떤 용이 목수염을 드리우고 아래로 내려와 황제를 맞이하자 황제가 올라타니, 여러 신하들과 후궁들이 깜작 놀라 쫒아 올라간 자가 70여명이니 되었습니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려 하나 사람들이 미쳐 올라가지 못하자, 이에 모두 용의 목수염을 움켜잡아 그만 목수염이 뽑히면서 모두 떨어지고 말았으며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지더라, 백성들이 우러러 봄에 용은 이미 황제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신하들은 그 활과 목수염을 껴안고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후세에 그로 인해서 그 곳을 일러 정호(鼎湖)라 했고 그 활을 오호(烏號)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백성들에게 곡물의 재배, 문학, 음악 등을 백성들에게 가러쳐 주고, 도량형을 만든 훌륭한 임금으로 알려 저 있습니다.

어느 날 황제의 내전에는 황제의 원비(元妃)가 된 서능씨(西陵氏)의 딸 누조(嫘組)와 그녀의 시녀들이 모여 차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찻물을 끓이는 탕기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누조는 정원에서 따온 누에고치를 자랑하며 손속에 간직하고 만지작거리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탕기의 뚜껑을 열고 찻물을 살펴보는 순간 손바닥에 가지고 있던 누에고치가 탕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누조는 깜작 놀라 급히 서둘러 나무젓가락을 가져와 탕기  안의 고치를 집어내려고 하였으나 잘 집어지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여 시도해 보았습니다. 나무젓가락에 달라붙어 나오는 것은 누에고치가 아니고 가느다란 백색의 끈이 달려 나왔습니다.

가느다란 실은 당기고 당겨도 계속하여 달려 나왔습니다. 당기고 또 당겨도 이어져 나오는 불빛에 반짝이는 백색의 실을 보았습니다. 이 우발적인 사건에서 누조는 고치에서 실을 뽑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손에 감겨있는 순백색의 아름다운 실 뭉치의 감촉은 따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조임성을 느꼈습니다. 누조는 순간적으로 이 아름다운 실을 사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궁녀들과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법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을 모아 비단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 하여 사람들의 의복을  만들기 시작 하였습니다. 비단의 원료인 고치실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누조라는 이름은 선조의 조(祖)와 여자(女), 밭(畑), 견(絹)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누조는 생을 마감한 다음 누에(蠶)의 신으로 받들어 선잠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선잠제 의식은 고려시대에는 늦은 봄 길한 사일(巳日)에 봉행하였고 조선 성종 8년(1477)에는 창덕궁 공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신축하여 왕비의 친잠례를 거행하고, 선잠단에 관리를 보내 제향의식을 매년 3월에 행하였습니다. 

융희(隆熙) 2년(1908년) 7월 선잠단이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었고 일제 때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은 찾기 어렵고 현재는 그 위치에 '선잠단지'라는 팻말이 세워지고 주변을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대한제국 말에 중단되었던 선잠제(先蠶祭)는 85년만인 1993년 재현하여 매년 전통문화 행사로 '선잠제례'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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