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지고 섬기고 베푸는 삶이 오히려 즐겁습니다. 인생이란 줄다리기에서 너무 팽팽하게 당겨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좀 여유를 갖고 돌아보면 삶이 훨씬 행복해집니다.” 목회자 한 분이 자신의 저서 ‘행복목회’를 발간하며 ‘행복목회’의 중요성을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또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목회자)들은 꼭 이기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훌륭한 신앙인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지요. 누구나 인생의 줄다리기에서 반드시 줄을 놓아야 하는 마지막 때가 옵니다. 당겨 이기는 것보다 배려하고 지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번에는 한 스님의 행적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 스님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라는 짧은 글을 남기고 스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욕심을 낼만한 대형 사찰(절)의 주지 직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조용히 떠났다. 자신이 속해있는 승적까지도 내려놓았다.

세간에는 그분에 떠남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수행자로서 온몸으로 화두를 던졌다” “모처럼 참 종교인의 표상을 보는 것 같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더니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고 전략적으로 잠수 한 것 아니냐” 등등. 한때 속세의 일에 관여하면서 반정부 인사로 낙인까지 찍히기도 했던 그런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다고도 했다.

그가 말하는 초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절을 떠남으로써 다시 세상에 돌아온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어떤 차이인가? 삶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는 것? 두 주먹 움켜지고 빈손으로 왔다 두 손 펴고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

“대접받는 중질을 하려면 중질을 그만둬라” 그는 자신의 스승 스님이 들려주신 이 말을 하면서 자기는 벌써 대접받는 중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또한 세상사와 절집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가 특히 불교만이라도 제 몫을 제대로 하면 세상은 자연히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따뜻한 겨울 양지바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다던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왜 그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살려고 하는가” “무엇을 그렇게 많이 챙기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숙연해지는 마음이 되면서 이제껏 가식으로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하면서도 자꾸만 남의 탓, 세상 탓, 북한 탓, 일본 탓.... 탓, 탓만 하는 게 우리의 참 모습이 아니었던가. 이런 이치를 깨달은 그는 “길을 가다가 죽으면 그처럼 다행인 것은 없소 중이 병원에서 죽는 것처럼 한심한 것도 없을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주지 직을 버리고 말없이 절을 떠났다.

아주 크고 조용한 죽비를 들고서 말이다. 그의 나직한 음성이 겨울 찬바람을 갈라놓으며 들려온다. “모두들 정신 차리세요. 우리 모두 함께 살 길을 찾읍시다. 남의 탓만 하지 말고요” 이쯤에서 공자의 제자 이야기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공자의 뛰어난 제자 열 사람(孔門十哲) 가운데 ‘자유’ 란 제자가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공자가 그를 찾아가 물었다. “자네는 사람을 구했는가.” “담대멸명이란 자가 있사온데 그는 지름길을 마다하며(行不由徑),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방에 찾아온 일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논어 옹야 편에 나오는 고사다.

선현들은 가까운 지름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갈지언정 바른길(正道)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게 군자의 첫째가는 덕목이라 가르쳤고 또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따라 행함을 우선으로 했다.

공맹의 도리를 달달 외던 선비들이 한 번 벼슬길에 오르고 나면 책 속의 바른길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중종 때 대사간 ‘유세침’이 군왕이 새겨야 할 덕목 7가지를 적은 상소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중 다섯 번째 조목. “분경(奔競=엽관운동)을 억제해야 합니다. 선비 된 자가 친분에 의탁하여 아첨으로 구하고 오직 방계곡경(旁谿曲逕)을 다투어 모방하고 있으니 사습(士習)의 훼손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까.” 방계곡경이란 숨은 계곡이나 샛길, 굽은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역시 정도가 아닌 길로 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반계(盤溪)곡경. 방기(旁岐)곡경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중종 초기라면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 공신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두를 때니 그에 빌붙고자 하는 이들의 엽관 행각이 오죽했겠는 가는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하다.

현실 정치에 깊이 발을 담갔던 율곡 ‘이이’ 역시 소인배와 군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소인배는 제왕의 귀를 막아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 라고 경계했다.

위에서 열거한 이 모두가 다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일진대 콧방귀도 안 뀌고 들은 척도 안 하니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세비만 축내는 국회 해산하자는 운동이 전 국민으로부터 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민생법안 처리는 강 건너 불처럼 방치하고, 선거구도 없어졌는데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비례대표와 의원수도 늘리자며 공천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국회의원들. 참으로 한심하고 딱하기만 하다.

국개의원(國犬衣怨)소리를 듣는 그들에게 군자의 향기까지는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해도 여야를 막론하고 그들의 몰염치가 풍기는 악취가 이 정도로 진동할 줄은 몰랐다. 자기 가족들을 위해 사리사욕을 취해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자기 직원들의 급료를 착취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뻔뻔함을 보이고, ‘을 질’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의원들이 ‘갑 질’ 노릇을 여전히 하면서 세간의 빈축을 사도, 업자들과 결탁을 해서 부정을 저질렀어도 치욕은커녕 한 줌의 창피함도 없이 철면피가 되어있다.

의원을 내세워 ‘내가 누군 줄 아느냐’며 ‘갑 질’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고도 피해자에게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도 없고 또 그런 의원을 지탄하는 동료 의원들도 없다. 감히 국가 원수인 대통령에게 막말과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어도 지적도 없고 자성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로스쿨 음서제’ 등등 모든 게 최소한의 윤리와 기준이 있는데도 잘못을 모른체하고 있으니 다른 것을 지적한 들 듣기나 하겠는가. 메리즈 환자는 병원 출입을 금한다며 병원 입구에 출입금지 표지를 부착했던 국회의장이 비상시국이 되었어도 직권 상정 외면하고, 자기가 주장하는 말 외에는 잘못되었다며 남의 말은 비난하는 모습들, 분노에 앞서 측은함까지 든다.

보도기사를 종합해서 보면 이 나라 선량을 자처하는 의원들의 ‘갑 질’이 가히 막가파 수준이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어떻게 생각하면 될 대로 되라는 것 같다. 내가 죽을 지경이니 모두 같이 죽자 식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치인들이 이럴 수는 없다. 새해 벽두부터 악취 나는 글로 지면을 더럽히고자 함은 전혀 없다. 담 벽에 균열이 생기고, 천장의 대들보가 흔들리는데도 거실의 집기를 어떤 것을 사다 놓을까 고심하며 남을 탓하는 정치꾼들에게 일침을 놓고 싶은 마음에서 글을 시작했을 뿐이다.

지금 선거구도 없어지고 시급한 민생법안이 산적해 있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의원들이 또 나랏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과연 이들이 지식인이고,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된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도 매지 말라는 옛말도 있다.

종교인들도 갖는 마음, 왜 정치인들은 못 갖는가. 정치인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정치 개혁은 절로 되는 것이다. 할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입으로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당명만을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추악한 물건들은 그대로 있는데, 정치권에 한 마디 하며 종결짓고 싶다. 더 이상 국민을 우롱하지 말고 또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국민의 이름을 더 이상 팔지 말라. 반드시 국민들의 엄중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국회가 해산되어야 한다. 욕이 절로 나오려고 한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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