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구세군의 자선냄비와 함께 냄비 앞에서 종을 흔드는 구세군을 보게 된다.

정치 무능, 경제 불황 탓인지 서울의 경우 지난해 보다 모금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더욱 더 목을 움츠리게 하는 소식이다.

이맘때가 되면 종을 흔드는 구세군 말고도 우리 시선을 끄는 게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불우이웃돕기 자선 디너쇼'인데 웬만한 호텔이라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인기가수 초청 디너쇼의 대형 프랭카드가 나붙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몇 해전 필자가 모 직장에 홍보실 책임자로 있을 때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11월 중순인 것 같았다.

어느 날인가 기자생활을 하다 기획사에 근무하는 후배로부터 보람있는 행사를 한번 추진해보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 후배의 말인즉,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인기가수를 초청한 디너쇼를 열자는 것이다. 의도가 좋아 그 행사를 추진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기획안을 마련키로 했다.

우선 행사에 따른 기금마련은 각 회원사에 초청장을 배당키로 했다. 아울러 명분상 초청 대상을 회원사 모범직원 부부로 했다.

결국 200개가 넘는 회원사에서 기금을 받아 이 행사를 하게 되면 내 직장은 돈 한푼 안들이고 자연스럽게 매스컴을 타면서 홍보가 되는 잇점과 함께 자신 알리기에 혈안이 된 회장(전직 장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그런 판단에 따라 그 후배와 며칠에 걸쳐 행사와 관련한 기획안을 짰다. 1억8000만원의 행사가 됐다.

모처럼 회사도 홍보되고, 회장도 언론에 띄우고, 또 불우이웃도 돕는 행사인 만큼 이 일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굳이 회장이 결재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기획안을 짜느라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흐뭇했다. 회장에게 '디너쇼 기획안' 결재에 앞서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출내역을 검토하다보니 호텔식대가 6000만원, 가수 초청비 6000만원, 기획사 2000만원, 내 몫 1000만원으로 책정되어 있는 게 아닌가.

1억8000만원 중 정작 불우이웃돕기에 쓰여질 기금은 3000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시 후배를 불러 내 몫 1000만원은 내 맘대로 하니까 불우이웃돕기 기금으로 돌리면 되겠지만 가수에게 6000만원이 지출되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지출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행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고액의 경비를 지출하는 유명가수를 초청할 수밖에 없다며 기획사 차원에서는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해가 되지 않고 참으로 기가 막혔다. 초청 대상자가 회원사 직원임을 감안, 여흥을 즐길 수만 있으면 되는데 유명가수가 3~4곡 부르고 천여만원씩을 지출한다는 것은 본 행사 취지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아 불쾌하기도 했다. 주객이 전도되는 기분이다.

회장 성격상 확실히 결재가 날 수 있는 행사 기획이었지만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난 내 직권으로 가수초청 디너쇼 행사를 취소했다. 물론 이 행사추진을 알고 있던 회장에게도 취소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후배는 어렵게 사는 선배(필자)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이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고 다른 단체도 다 그렇게 하는 게 관행인데 그런 좋은 기회를 포기하다니 안타깝다며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자리를 떴다.

대다수의 불우이웃돕기 디너쇼가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떠나는 후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되었다.

불우이웃돕기를 한다며 정작 덕을 보고 수입을 올리는 건 부자인 가수였기 때문이다. 취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다며 오히려 부자들에게 짭짤한 수입을 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 쑤어 남 좋은 일만 하는 격이다.

정말로 불우이웃돕기 기금 마련을 위한 디너쇼라면 그렇게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어려운 사람 하나를 더 돕기 위해서라도 이럴 때일수록 더 검소한 행사로 치러져야 한다.

유명가수든 아니든 초청된 가수도 이런 행사를 이용, 엄청난 수입을 취하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속을 차리려는 그 얄팍한 상술은 선량한 시민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또 하나의 사례를 꼽자면 모 단체가 지방 양로원을 방문, 전달한 위문품 금액이 100만원에 불과한데 반해 봉사단원들의 저녁 식사비와 노래방비가 그 배로 지출됐다는 서글픈 사실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업적은 만들기 위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 같은 형식적인 행사는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 좀 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문화행사로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봉사와 헌신 보다 상술이 우선인 이 같은 행사. 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들 중 하나이다.

바램이 있다면 모진 비바람이 불어와도 이 겨울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겨울로 지나갔으면 한다.

[시인.수필가.AIU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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