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성경에도 쓰였듯 사실 사랑이라는 말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말은 없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처럼 오해되고 왜곡되고 심지어는 악용되는 말 또한 세상에 없는 것 같다.

예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했다.

이는 하나님 사랑과 자신의 몸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웃 사랑은 '나'의 이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어야 하고 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존경과 관심, 그리고 도움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사랑의 개념을 잘못 해석하는데 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중심적인 입장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오류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 못하고 불신하며 오해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이고 고통인지 모른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또는 친구들간에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척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그런 심정에서는 고귀하고 진실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처럼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욕심에 사로잡혀 나 외의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순수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관심도 다른 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어쩜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특히 체면, 실리, 사리사욕 때문에 진심과 정의를 외면하는 것도 올바른 이해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말로만 사랑, 사랑하면서도 얼굴은 딱딱하게 일그러져 있고, 무표정하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진정한 사랑은 촛불과 같이 자신을 뜨겁게 태우며 희생하는데 있다. 또한 더러움을 씻어주며 자신은 녹아 없어지는 비누같은 사랑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환하게 웃는 얼굴,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는 등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해 상대가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마음이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이 다가온다.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대가족제도가 핵가족사회로 변화되면서 이기적인 삶 속에서 사랑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는 가운데 사랑의 화신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됐다. 부활 승천하신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한다.

예수의 이웃사랑 실천은 현실을 변혁하고 개혁과 이를 변화시키려는 혁명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행하는 사랑실천은 결국 예수님처럼 고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우리 마음에 십자가 없는 사랑실천은 거짓 사랑, 위선의 사랑이다.

촛불같은, 비누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삶을 살며 이 땅을 밝게 하는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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