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소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고향생각, 코흘리개 어린시절 고향친구들이 문득문득 생각나며 그리워진다.

그럴 때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며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한다.

이번 설 만해도 그렇다. 주일날이기도 했지만 애당초 고향 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고향엔 지금도 칠순이 되신 노모 한 분이 외롭게 살고 계신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극성스런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추석이나 설을 전후에 모친을 뵈러 고향길을 찾기도 했었다.

올 설에도 어김없이 아내가 설 전후로 모친을 모셔오라고 극성이다. 덕분에 수 삼일에 걸쳐 고향의 모친에게 전화를 했으나 거의 설 전날 오후 늦게서야 통화가 됐다.

예상했던대로 모친은 자식걱정이다. 모시러 내려가겠다고 했더니 길도 막히고 몸도 좋지 않으니 설 지내고 한가한 때 내려오라고 하신다.

아내는 설을 혼자 지내게 해서는 자식도리가 아니라며 다녀오자고 했지만 결국은 내가 가지를 않았다.

이처럼 고향길을 그리워하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길도 막혀 왕복 십여시간 걸리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픔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고향일수록 무슨 절기라도 될라치면 더욱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이번 설 연휴에도 마음 같아서는 고향 가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싶었다. 특히 노모가 홀로 쓸쓸한 설날 아침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며 아프다.

사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서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경기도 평택이다. 평소에는 서해안 고속도로로 달리다보면 두어시간 남짓되는 거리다.

그런 거리의 고향이지만 이제는 내 고향이 아니다. 코흘리개 동네 친구도 없다. 주말이면 철길 건널목까지 나오셔서 자식을 기다리던 부친도 안 계시다. 또한 부친이 애지중지 키우던 장미넝쿨의 서구형 단층짜리 빨간 벽돌집도 동생의 부도로 날리고 없다.

그 옛날의 향취는 아무곳에도 없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모두가 다 변했다. 아침이면 까치가 울던 마을 어귀 고갯길도 온데간데 없다.

고개 넘어 졸졸 흐르던 개울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가을날에 참새를 쫓던 들녘의 허수아비 전경도 사라졌다.

필자가 다니던 국민학교도 간판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학교앞 도로도 모두 파헤쳐져 큰 길로 넓혔고 유리알처럼 포장된 아스팔트길을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들이 무섭게 질주한다.

푸르던 산이 깎이고 맑은 시냇물이 메워진 채 유령이 사는 것 같은 시꺼먼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그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내가 외계에서 온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며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든다.

고향 하늘은 있어도 고향의 향취는 없다. 그곳은 이미 내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서구문화와 함께 과학의 발달은 우리의 고향을 모두 지워버렸다.

어느 소설인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독백처럼 한 말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돈도 벌고 명예도 얻은 후 주인공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찾았지만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너무나도 변한 고향 땅을 바라보는 순간 당황하고 실망을 하며 다시 기차에 오르며 한 말이다.

그 주인공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향수가 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며 슬픈 독백을 한 것이다.

그나마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이나 멀리 가족들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켜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는 게 여간 다행스러운게 아니지만 향수병에 가슴을 앓기는 매한가지일 것 같다.

이처럼 사람들이 왜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지만 고향은 그저 그리운 향수가 있어 그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워하는 고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 모두는 이제 고향을 잃어버렸다. 육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의 향취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우리 앞길에는 또다른 마음의 고향이 있다. 그 고향은 바로 오래 전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에덴의 동산이다. 이제 영원히 변치않는 마음의 고향을 찾는 우리가 되자.

안호원(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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