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를 위해 집을 나서려 하는데 며칠 전 모직장 퇴직사우회가 주관한 송년회에서 만났던 옛 직장동료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대뜸 하는 소리가 니가 무슨 원장이냐, B대학은 어디에 있느냐며 사기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슨 피해자라도 된 것처럼 흥분으로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뜻밖의 전화를 받다 보니 기가 차기도 하고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불그스레해지며 가슴이 뛸 정도가 되었다.

화가 치미는 것이 말대꾸를 하려다 분을 삭이며 그 친구에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 나이에 사기를 치고 다니겠냐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학교에 도착, 학기말 시험을 치르면서도 줄곧 그 친구의 불쾌한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생각만해도 별로 기분이 안좋은 그 친구는 80년 D협회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이자 20년 후인 H협회에서도 잠깐 근무를 함께 했던 인연을 갖고 있는 친구였는데 두 단체 모두 필자가 먼저 입사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동갑내기라는 입장에서 허물없는 사이가 된 친구다.

지방대를 나온 그 친구는 평소에도 필요이상으로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친구다. 그런 친구가 필자의 명함을 받아보고 그 성격에 열을 받았나보다.

다소 분한 마음이 들어 전화를 해서 욕이라도 실컷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감정을 삭이고 "친구야! 친구가 잘되면 좋은 게 아니겠니? 좋은 친구가 되길 빌께. 좋은 밤 되렴."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즉시 핸드폰이 울렸다.

필자는 낮은 목소리로 지금 시험감독 중이라고 하자 "으응. 그래 알았다."라는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초 여름. 몇 십년을 자기기준에서 틀에 박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그 친구가 자기개발을 위해 그 긴 시간을 학문 연마에 몰두하며 변화된 필자를 모르는 것 같았다.

문득 필자가 하버드대학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의료정책과정을 수료하고 또 '다음' 등 검색포털 사이트에서 내 이름으로 검색할 경우 내 이력사항이 나오는 것을 알면 그 친구가 어떤 모습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그 친구는 지금도 필자가 교사자격증 취득을 위한 주말교직과정을 다니고 신학대학에서 심리상담학을 연구하는지도 모른다.

또 아내가 정성스레 싸준 점심을 먹고 책을 복사해서 밤을 낮 삼아 공부하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동안 꾸준한 창작활동으로 일본에서 문화공로훈장을 받은 것이나 몇 개의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모른다.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틀안에서 변화된 타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갖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런 까닭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며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배워 지식을 많이 얻었다해도 덕(德)이 없으면 죽은 지식이 될 수밖에 없다.

기분대로라면 그 친구에게 한바탕 욕지거리라도 하고 절교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죽음으로 이별하는 것도 가슴아픈데 하물며 살아 있으면서 절교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없다.

이는 필자가 늘 되뇌이는 말이지만 열 친구를 버리기는 쉬워도 한 친구를 얻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썩은 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언제나 맑은 물이 되어 썩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의연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행여 마음에 두면 아픔이 되고 상처로 남을 수 있지만 흐르는 물처럼 흘려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

필자 역시 그런 마음이 되어서 친구를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 문자를 보고 다시 전화를 했던 그 친구가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내가 좋은 친구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을 것으로 믿는다.

지나치고 나면 그만이다. 따라서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는 것이다.

아량을 베푸는 마음이 되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논설위원 안호원(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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