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지도자 등소평.

2004년 8월 22일, 등소평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일대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딸 등용을 통해 되돌아보는 <대륙의 지도자 등소평>이 출판사 북스토리에서 재출간되었다.

1993년 삼문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출간되어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이 책은 등소평의 셋째 딸이자 저자인 등용이 아버지 등소평의 일생을 진솔하게 서술한 <我的父親鄧小平 上>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등소평에 대한 대서사시이며 중국의 근현대사를 가장 현실감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책의 뒷 이야기인 <我的父親 鄧小平-文革歲月>은 김영사에서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대륙의 지도자 등소평>에는 등소평이 어린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고학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로 변모해 간 전후사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등소평이 일개 현위원회의 서기에서 중국공산당의 최고 통치자로 성장해 간 일련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

등소평과 중국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들인 모택동과 주은래, 중국현대사상의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진 배경을 어디에 있고 대륙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역설하고 있다.

지은이는 등소평의 가정, 혼인, 성격과 취미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여, 오늘날 중국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온 최고실력자 등소평에 관한 모든 것을 밝히고 있다.

북스토리 732쪽 2만3000원. 인터넷서점을 통할 경우 1만61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등소평의 생애

등소평은 1904년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등소창, 자는 문명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은 땅이 약간 있고 일꾼 몇을 두고 농사를 짓는 소지주 정도의 신분에 불과했다.
이 당시 대외적으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으로의 침략에 손길을 뻗기 시작했고, 중국 내부에서는 1905년 손문이 결성한 중국동맹회 등에 의해 혁명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는 시기였다.
한편 청조 내부에서는 입헌운동을 통해 쓰러져 가는 청조를 살리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광서제와 서태후의 병사(病死)에 이어 2살 된 어린 부의가 황제가 되고 그의 아버지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입헌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중국동맹회는 1907년부터 꾸준히 혁명 봉기를 시도하여 마침내 1911년 무창 봉기를 선두로 하여 호남, 성서, 강서, 산서, 상해, 정강, 광동에서 봉기하여 중국 24성 가운데 14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남경에서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청조의 마지막 희망으로 혁명군을 탄압하러 보내졌던 원세개가 손문과 협의를 거쳐 자신이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는 조건으로 청조에 등을 돌림으로써 2월 12일 선통제가 퇴위했다.

이로써 끝내 청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 마저 원세개의 황제가 되려는 야심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고 원세개는 중화제국을 세워 황제가 되려고 했으나 다시 혁명파들의 제제(帝制)반대를 요구하는 무장 봉기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울분 끝에 죽고 말았다.
원세개가 죽음으로써 중국 각지방은 그 지역의 군벌들에 의해서 지배되게 되었다. 이처럼 등소평은 중국의 봉건적 사슬을 끊어버린 혁명 전야에 태어나 혼란스러운 중국 상황에서 성장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해외 유학을 거쳐 귀국한 혁명가들이 많았는데 이들에 의해 중불교육회, 근검공학회 등이 설립되어 해외 유학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던 지식인들에 의해 프랑스로의 유학이 많았었다.
당시 중국은 청천벽력과 같은 두 가지 사건이 대륙을 뒤흔들었다.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5·4운동’이 그것이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중국의 혁명적 지식인들을 크게 고무시켜 이대교, 진독수를 비롯한 사람들은 10월 혁명의 위대한 의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 전파하기에 앞장섰다.
1919년 5·4운동은 반제 반봉건의 혁명운동으로써 중국 신민주의 혁명의 단추를 열어놓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조의 전파와 5·4운동의 폭발은 프랑스 유학운동을 더욱더 고양기로 끌어올려 전국을 풍미하게 했다.
등소평도 비교적 부유한 집안과 깨어있는 아버지 덕분에 이러한 운동에 힘입어 프랑스로의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파리 유학 중이던 1924년 당시 20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9년 광서성(廣西省)에서 폭동을 주도했고 농공홍군(農工紅軍) 제7군과 제8군을 창설해 혁명거점을 건립함으로써 일찍이 혁명가적 기질을 보였다.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 모택동 파의 유력한 간부가 된 등소평은 야전군의 지도자로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1976년 모택동의 사망 후엔 중국의 현대화 4개항(농업현대화, 공업현대화, 국방현대화, 과학기술현대화)강령의 하나로 군의 현대화를 적극 추진, 군사전략가로서도 탁월함을 보였다. 이는 후에 당정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또 ‘3하3상’으로 불리는 세 차례의 실각에서 재개했고 1989년 6월 천안문사태 이후인 그해 11월엔 일체의 공직에서 사임하고서도 임종의 순간까지 최고 지도자로서 군림했다. 19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정책의 기치를 내걸고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그는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화 된 중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새로운 궤도에 진입시켰다.
사회주의와 개혁개방 추진에서 오는 이념상의 갈등을 경제적으로는「1개 중심점」-경제건설-과 정치적으로는「2개 기본점」-사회주의 고수, 공산단 지도 등 4개 기본원칙과 개혁 개방 견지-이라는 지도노선을 해결해 온 것도 그의 수완이었다.
등소평은 외교면에서도 전략사상을 분명히 제시했다. 대만과의 관계를「1국2체제」방식으로 처리한다는 원칙을 확립, 대만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단교로 대처해왔다.

등소평은 중국에 새 질서를 새웠지만 그에 따른 시련과 과오로 풍운의 삶을 살았다.
그는 1933년 공산당 국제파에 의해 국민당 군대와의 투쟁방법을 달리 주장한 모택동 파로 몰려 강서성 당서기직에서 해직됐다. 그의 첫 번째 실각이었다.
1934년 국민당 군대의 포위를 뚫고 홍군(紅軍)과의 장정을 시작한 등소평은 1935년 당중앙비서장으로 뽑히며 다시 정력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모택동의 신임을 얻으면서 중국 정부수립후인 1952년 정무원부총리로 승진했다.
그러나 1966년 문화혁명 초기 유소기와 함께 모택동 파인 홍위병(紅衛兵)의 행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도, 모택동의 분노를 사며 1967년 7월 공직으로부터 파면됐다.
그리고 1968년 10월에는 강서성으로 유배되어 기계공장에서 일을 하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그의 두 번째 실각이었다.
등소평은 1973년 국무원부총리로 복귀되었다. 1975년 당정치국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부총리와 군총참모장도 겸임하게 된 그는 문화혁명의 급진노선을 비판했다.
4인방으로 불리는 문화혁명 파로부터 수정주의자로 반격을 받은 그는 1976년 청명절인 4월 4일 주은래 추모시위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또 다시 실각했다. 그의 세 번째 실각이었다.
1976년 10월 모택동의 사망과 4인방의 체포이후 1977년 3월 모든 직책을 돌려 받은 등소평은 모택동 사망 이후 주석직을 수행해 온 화국봉과 대립했다.
등소평은 19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에서「1개 중심점과 2개 기본점」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의 실권장악 이후에도 개혁속도에 대해 끊임없이 제동을 걸어온 보수파와의 갈등 속에서 후계자로 내세웠던 호요방을 1987년에, 조자양을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물러나게 하는 방안으로 정치적 시련을 견디어 냈고 그 와중에 과오도 범했다.
그는 1980년 이탈리아 가지 올리아나 팔라치에게 "겁여러 차례의 치명타를 극복한 것은 실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란 바다의 큰 파도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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