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 대학에 겸임교수로 있는 후배가 침울한 표정으로 찾아와 아내의 폭언에 대해 하소연하며 지금 중학생인 딸이 시집갈 때까지만 참고 살다가 아내와 헤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 후배는 외국에 유학까지 가서 학위를 받고 온 영문학 박사다. 그럼에도 불구, 일명 보따리 장사인 강사로 16년 동안 몇몇 학교를 발이 닳도록 주야로 뛴 친구다.

물론 부인과 처가쪽이 80년말 초기에는 박사교수 남편, 사위를 상상하며 상당한 기대를 걸고 부푼 꿈에 젖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학위를 받고 돌아와 십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시간 강사로 허덕이다 보니 경제사정이야 말하지 않아도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한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부인이나 처가로서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의에 빠져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싫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삼년 전 겨우 어찌하다 받은 겸임교수라는 직함의 명함과 신분증.

어떻게 전임자리 하나 얻을까하고 동분서주하며 울분을 삭이는 그 후배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 부인의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해진다.

필자 역시 강의 준비하는 시간에 비해 수입이 적다보니 아내가 앙탈을 부려 마음을 무겁게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예리한 칼로 베이는 심정이 되지만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술을 굳게 닫고 있다는 것뿐이다.

학교 강의는 아예 직업으로 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 아내가 얼마 전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서재를 마련해주며 이제는 책상에 앉아서 글도 쓰고 공부도 하라고 한다.

아내가 빚을 내어 어렵사리 현관 모퉁이에 꾸며준 4평 정도의 서재, 장모님이 민망해할 정도로 난 좋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지는 철부지가 된다.

문득, 문호(文豪) 중에 '주홍글씨'를 쓴 저자 '나다니엘 호돈'의 아내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아내는 어느 날 남편이 창백한 얼굴로 돌아와 자신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상기된 얼굴로 "이제는 당신이 맘놓고 글을 쓰게 되었다"며 먼 훗날 천재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하면서 남편의 자존심을 살려 불후의 명작인 '주홍글씨'를 남기게 했다.

이처럼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인생이 희망을 갖게 하기도 하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성경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그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보기에 좋았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으로서 그 깊은 뜻을 이루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말이란 만물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천주교회에서 성찬용 포도주 잔과 관련해 두 가지 실례가 있는데 하나는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실수로 성찬용 포도주 잔을 떨어뜨려 신부로부터 다시는 "재단 앞에 오지 말라"는 저주와 함께 뺨을 맞고 쫓겨난 경우가 있고,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괜찮다"며 오히려 신부에게 위로를 받은 소년이 있었다.

후일에 뺨을 맞고 쫓겨난 소년은 공산주의의 대지도자격인 유고의 대통령 '티토'였고, 위로를 받은 소년은 유명한 대주교가 된 '훌톤 쉰'이다.

이처럼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저주가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어 쓰러지게도 한다.

굳이 나다니엘 호돈의 아내나 정약용의 부인 홍씨처럼 될 수는 없어도 기왕이면 우리 입술에 사랑과 축복의 언어를 묻혀 말했으면 좋겠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사랑이 듬뿍 담긴 언어를 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상 속의 삶이란 힘든 법이다. 아무리 어렵다해도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중한 말 한마디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인 것 같다. 후배의 부인 역시 남편의 아픔을 감싸주며 위로의 말로 후배가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재물은 없어도 대신 명예를 얻었다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다.

세상 바람은 언제나 부는 법이다. 때로는 강풍으로, 미풍으로 불어온다. 아무튼 난 날품팔이 하는 아내 덕을 톡톡히 본다. 비록 주머니가 비었어도 이제 서재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이 나를 배부르게 하고 행복감에 빠지게 한다.

논설위원 안호원(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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