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지갑에 '회원권'을 넣고 다니고, 빈자는 '회수권'을 넣고 다닌다.
부자는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고, 빈자는 '사우디'에 가서 땀을 뺀다.
부자는 주로 '맨션'에서 살고, 빈자는 주로 '맨손'으로 산다.
부자는 영양과다로 '헬스'클럽에 다니고, 빈자는 영양부족으로 '핼쓱'한 얼굴로 다닌다.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재미있게 풍자한 말이다. 비록 우스개 소리라 하지만 빈자가 느끼는 배고픔과 배가 아파 굶은 부자의 느낌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는 그런 빈곤을 느끼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배고픈 자의 설움이다.

요즘 들어 부쩍 살기가 어렵다고 하는 소리가 많아졌다. 밥맛도, 잠맛도, 살맛도, 입맛까지도 없고 심지어는 죽을 맛이 난다고 아우성이다.

이제는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끼니때마다 식단을 바꿔 먹으면서도 맛이 있느니, 없느니 투덜거리고 옷도 역시 철마다 갈아 입으면서도 불평을 많이 하면서 앞으로의 살 일들에 대해 걱정을 한다.

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의 근심 걱정 가운데 40%는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며, 12%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고, 오직 8%만이 진정으로 걱정할 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나머지 8%의 걱정 근심도 무익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8%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대신 맡아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참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근심 걱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믿음이 적은데서 온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그 같은 믿음 안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맹신적인 믿음만 갖고는 안된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내일에 대한 비젼이 있어야 한다. 즉, 잠만 자는 자(者)는 꿈만 꾸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는 자(者)는 꿈을 키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키우는 꿈과 현실의 거리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꿈과 낭만은 지극히 아름답고 화려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매우 초라하고 누추할 수도 있다.

누구든 그런 꿈을 꾸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처음 출발할 때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상실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무척 초라해지고 누추해지며 때로는 비관적이 되기도 한다.

꿈을 키운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둥바둥 살면서 우울한 체험을 거치다보면 꿈은 사그러들고 아름다운 낭만은 나이와 함께 빛이 바랜다. 오직 남는 것이란 상실의 아픔 뿐이다.

그러나 그런 아픔속에서도 또 다른 새 날, 새 아침을 맞이하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벌써 물이 반 컵 줄었네"가 아니라 "아직도 반 컵에 물이 남아 있다"는 여유로움으로 나누며 베푸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필자의 경우도 가끔 힘들고 지칠 때면 혼자 흥얼거리며 눈물로 부르는 노래가 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인성이 사라지고 험악한 세상이 되었지만 믿음과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부자나 빈자가 가는 죽음의 끝은 똑같다. 아무쪼록 절망의 늪에 빠질지라도 아름다운 꿈의 물결을 새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에 여유를 갖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안호원(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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