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이 종정에 취임한 직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불자(佛者)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 말에 속지 마라"란 말을 했다고 한다.

종정이란 자리에 현혹되어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스스로 개발해 쓰도록 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단다.

성철 스님이 오랜 제자 원택 스님에게 나긴 글귀가 '불기자심(不欺自心)'이다. 남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경지는 더 깊다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외부의 시련과 갖가지 유혹속에서 자신과의 약속을 흔들림 없이 실천해 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범인(凡人)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 안기부 미림팀 공운영 팀장이 은닉해 온 불법 도청테이프(274개)에 정·재·관 법조계·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치명적인 약점들이 담겨진 판도라의 상자로 드러나면서 관계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술렁이는 등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 테이프가 검찰에서 우려하듯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될 경우 사회 전체에 미칠 충격파가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도라의 상자가 된 X파일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증폭되고 있지만 그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안개속에 묻혀 있는 등 구구한 말만 무성하게 나돌고 있다.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도 쉽게 입을 열고 있지 않고 오정선 전 국정원 차장 역시 책임은 지겠다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테이프를 수거하는 과정에서 공씨와 은밀한 협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천용택 전 국정원장 등의 미온적인 태도 등이 더욱 짙은 의혹을 낳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사실을 굳이 외면한 채 한 뼘에 불과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더 넓은 진실을 덮으려는 우매한 짓을 하고 있다.

남을 속일지언정 자신만은 속이며 살지 말라던 성철 스님의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더욱이 인권 대통령을 자처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청파문과 관련, 피해자가 가해자 입장으로 바뀌면서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은 폐렴증세로 우려할 만큼 건강악화는 아니라고 하지만 몇 십년동안 베일에 쌓인 그 분의 입원은 오히려 의심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이제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 항간에 배후 인물로 지목받고 있는 김현철씨, 그리고 당시 김대중 정부 핵심 실세로 통하던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천용택 전 국정원장이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의 사실을 밝혀 국민 앞에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분명 누군가가 지시한 사람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보고되었을 사항인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안다는 사람이 없다. 불과 3년전 일인데도 불구,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건 말도 안된다.

국정원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정보기관으로 거듭 나겠다고 했다.

진정 그런 마음이라면 검찰이나 특검이 밝혀 내기 전 스스로가 모든 것을 공개하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의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판도라 상장의 뚜껑을 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특히 양김 전 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국민 앞에서 자신만은 속이지 않았으면 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두 분의 삶을 보면서 지인무명(至人無名 : 지극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지위와 이름이 없다)을 생각해 보았다.

논설위원 안호원(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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