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와이쓰(Robert Weiss)가 쓴 '고독한 사회악'을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웃과의 만남이 단절되었을 때가 가장 고독한 때라고 했다.

조직적인 삶을 영유하는 인간은 만남을 시작으로 행, 불행의 맛을 음미하면서 인생을 엮어간다.

이 같은 관계를 역설한 사람 중 '마틴부버'는 그의 저서인 '나와 너'에서 인간관계는 나와 너(I and you)의 관계가 아니면 나와 그것(물질(I and it)의 관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중한 만남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며 맞이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만남으로부터 삶이 시작된다. 환경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어떤 이는 행복을, 어떤 이는 불행을, 또 어떤 이는 기쁨과 슬픔을 만나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구조적으로 시시각각 만남을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동물이다.

그런 연유에서 환경과 사람을 잘 만나게 되면 축복을 받은 자가 되고 복을 받은 자가 될 수 있지만 잘못된 만남이 될 경우에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환난과 시련의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축복된 만남으로 행복감에 젖어 웃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만남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과 실패로 인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행복과 불행이 선택될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복'이다. 좋은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이다.

좋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만남의 시간이 즐거워야 되고 자기를 던져 남에게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마음은 모든 것을 다 퍼내도 줄지 않고 또 모든 것을 다 담아도 넘치지 않는다.

성경에도 좋은 만남을 통해 축복을 받은 자들이 있다. 재력은 있으나 유대 백성들에게 왕따를 당하며 사기꾼, 매국노라고 욕을 먹던 세리장 '삭게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참사랑을 알게 되고 평안한 새 삶을 찾을 수가 있었다.

또한 간음한 여인이 체포되어 '영(靈)'고 '육(肉)'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찰나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도 해방되어 영혼이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된 것을 볼 수 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살다보면 어디에선가는 또다시 만나 해후(邂逅)를 하게 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듯 우리의 만남이 원수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필자의 경우 언론에 종사하면서 교직에 있다보니 늘 현장에서 많은 이들을 접하게 되는데 다른 부처에서 우연히 만날 경우 여간 반가울 수가 없다.

특히나 학교에 갔을 때 학생들이 먼저 아는 체를 할 때는 삶의 보람을 느끼기까지 한다.

권위와 교만함이 대단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대단히 추한 것이다. 아울러 겸손과 낮춤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아름답고 귀한 것일 수도 있다.

'나'와의 만남으로 모두가 기뻐하고 함께 하며, 없을 때는 그리워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 벌어진 軍 총기 사건의 경우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총기를 난사한 김 일병을 비롯, 억울한 죽음을 당한 소대장과 사망자들은 '잘못된 만남'의 결과다.

기왕에 만나게 되는 우리의 만남, 좋은 만남으로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밝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안호원(한국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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