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가정의 달이자, 어린이날이 있어서일까? 식당은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 우연히 한 곳에 시선이 갔다. 한 가족인 것 같은데 시아버지와 며느리인 듯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드리고 며느리는 상추에 고기를 싸서 안주로 드리며 즐거운 모습, 행복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잊고 있던 부친(父親)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필자도 오래전에는 저런 모습의 시간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과거의 추억으로 되고만 부친과의 관계.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부러운 듯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은 딸이 아빠를 부르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부친이 살아 계셨을 때는 언제나 뵈올 수 있어 부러워할 필요도 없었던 그 모습들이 이제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아파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시는 뵈올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게된 현실속의 부친. 함께 하고 싶어도 이 세상에 아니 계신 부친, 새삼스레 그 빈자리가 얼마나 가슴을 허탈하게 하는지 목이 메여온다.

서양화가이자 아동미술가로서 교편생활을 하셨던 아버님. 어린 시절 5남매 자식들의 미술을 지도하시며 그림을 스크랩했다, 자식들이 결혼할 때 '스케치북'을 만들어 나눠주시던 내 아버님.

그 아버님께서 작고하신지도 어언 4년의 세월이 흘러갔건만, 지금도 어떤 때는 고향집에 계신 것 같은 착각에 마음으로나마 고향길을 달리다가도 안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저린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건 다 지나간 일이고 후회해도 다 소용이 없는 일이다. 아무리 잘 해드렸어도 떠나고 나면 이렇게 후회가 되고 마음이 아픈게 부모와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인 것만 같다.

결국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은 큰 복을 받은 사람들 같다. 내가 더 가슴이 아프고 후회하는 것은 부친을 생각한 내 마음 때문이다.

6.25 전쟁을 겪은 내 경우 부모님께서 교편생활로 고향을 떠나 생활하시던 탓에 엄마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느낄 어린시절, 외할머니댁에서 산새들을 벗하며 외롭게 자랐다.

외할머니가 밭에 나가신 후에는 나무가지를 꺾어 마당에 엄마, 아빠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리움에 목말라하며 자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렇게 성장하면서 방학이 되어서야 잠시 부모님 곁에 있을 수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한 부모님이 친부모라기보다는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 같은 느낌으로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 외로움에 배인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마음이 늘 내 마음 한 구석에 있다보니 부모님을 부모로서 모시면서도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느끼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역시 늘 함께한 동생들에게 더 애정을 느끼시는 분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난 어린시절부터 이 다음에 결혼하면 절대 어린자식과는 떨어져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단 한번이라도 친부모로서 응석을 부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싶었지만, 십수년이 지나 부친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 같은 허전함을 무엇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같은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 설움이 북받친다. 그런 마음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번 주말에는 딸과 함께 부친이 계신 선산(先山)을 찾아볼까 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기다리세요. 곧 며느리랑 귀여운 손녀와 함께 달려갈께요."


논설위원 안호원(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 서울정보기능대학 겸임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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