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12월이 되면 순간적으로 연상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성탄절일 것이다.

이 같은 성탄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왠지 모르게 기대감과 설레임을 안겨주며 들뜬 마음이 된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성탄절이 언제인가부터는 상혼에 멍드는 일회성 환락의 날로 전락되는 등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게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벌써부터 성탄 트리와 산타할아버지가 교회는 물론 대형백화점은 물론, 호텔, 상가 등 심지어는 지하철에까지 안 놓여진 곳이 없을 정도로 설치되어 있지만 경제위기가 불어오고 어수선한 탓일까 예전처럼 들뜬 분위기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새 연말, 우리 모두에게 유난히 힘들었던 올해 겨울이 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엊그제부터 나선 자선냄비의 모금마저 예년만 못하다고 한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 성탄절을 맞이하며 한 해를 보내야만 하는 빈곤 자 들에게는 그저 우울하고 긴 한숨만 나올 수밖에 없는 성탄절이 되고 말았다.

그런 느낌에서일까 거리에서 울려 나오는 '노엘', '노엘' 노래 소리가 왠지 모르게 구슬프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성탄절을 즈음한 기간에 해외여행과 스키장을 가기 위해 여행사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그만큼 빈부의 격차가 심한 사회가 되어버렸고, 성탄절의 의미도 크게 왜곡되고 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광명을, 눌린 자를 자유케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본래의 뜻이 잘 알려지지 않는 성탄절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

결국 잘못된 열매로 인해 '이날 안 놀면 또 언제 노느냐' 하는 식으로 막가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오면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온갖 곡식과 과일이 열매를 맺는 추수 때가 온다. 다 같은 결실을 맺는 곡식이지만 그 열매들은 알곡과 가라지와 쭉정이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알곡은 좋은 열매로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지만 아무 쓸모 없는 가라지와 쭉정이로 갈라진 나쁜 열매는 들녁에 버려져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삶도 결국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진 삶을 살게 된다.

얼마 전 종로3가 전철역과 을지로3가 지하도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노숙자들과 노인들을 본적이 있다. 한결같이 그들은 취해있었고, 또 초라하고 웅크린 모습으로 있었다. 희망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이 땅에 그런 부류가 계속 생존하고 양산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고 한편으로는 가라지가 되어 삶의 희망을 잃고 자신의 한치 앞길을 개척할 수 없는 저들이 안스럽기까지 했다.

우리가 송년 회다, 동창회다 하며 축배 잔을 높이 들고 함박웃음을 터뜨릴 시간에 달빛마저
없는 외진 곳에서 춥고 허기진 모습으로 외로운 밤을 지새우는 우리의 또 다른 가난한 이웃이 있다는 것을 한번쯤은 생각해봄직하다.

성경에도 있듯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신 이유는 분명 가난한 자와 죄인, 고통을 받는 자들을 위해 죽음까지 희생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든, 없든 우리는 성탄의 기쁨과 더불어 내면의 아픈 의미까지 생각하며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아름다운 모습의 성탄절로 우리 모두가 포근한 사랑의 향기가 넘치는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한 해를 보냈으면 한다.

논설위원 안호원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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