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불가에서 생각과 말(言語) 몸(肉身)을 다스리는 근본을 무념(無念)과 무언(無言)·무행(無行)이라고 한다.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10월15일부터 그 이듬해 1월 15일 까지 두 차례에 걸쳐 무집착과 무소유의 생활로 돌아가는 안거(安居)가 바로 그런 수행(修行)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중생들과 접하면서 알게 모르게 묻게 마련인 세속의 때를 이때에 말끔히 털어낸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수천여명의 스님들이 3개월간 화두를 잡고 산문 안에 틀어박혀 용맹전진 하다 하안거 생활을 끝내면서 중생 속으로 다시 만행(萬幸)의 길을 떠난다고 한다. 또다시 중생의 고통을 살피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으로 세속인들에게 청량한 바람을 일으킬 범어를 전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범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지는 마음과 안목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어느 노(老)스님의 말처럼 마음은 유심(有心)으로도 알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실수나 잘못에 대해 좀처럼 시인을 하지 않으려 든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에 앞서 자기변명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등 피할 수 있을 때까지 잡아떼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령 증거가 나와도 자기의 합리화를 위한 변명 등 말 돌리기에 급급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가족이나 남에게 실수나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 스스로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님들처럼 안거의 생활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중생들이 세상을 밝고 어질게 살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바꿔야 할 것 같다.

세상이 밝아지려면 결국 마음을 곱게 써야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마음은 분명 색깔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리고 허공을 감쌀 정도로 큰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아주 작은 유리조각 파편도 들어갈 수 없는 것 또한 마음이다.

필자가 이렇게 쉽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사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기사 수시로 변하는 것이 마음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서로가 자기마음을 너무 강하게 내세우면 상처만 입게 되는 건 뻔한 이치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최대한 낮추는 동시에 상대방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 중에 눈에 띠는 만큼만 만족해야한다. 너무 욕심을 부리며 없는 것을 찾고 바란다면 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맘대로 끌어들이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이 가져가도록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항상 상대에게 욕심을 앞세워 무엇을 강요하거나 일방적인 요구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갈등이 오는 것이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사랑은 결코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이제라도 우리 마음을 바꿔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자. 그리고 한번쯤이라도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음미하며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늘 그래왔지만 요즘 국감을 실시하는 정치인들이나 증인으로 나온 분들을 보면 더욱더 스님들의 ‘하안거’ 가 생각난다. 국민들에게 자기들의 잘못은 반성치 않으면서도 오히려 상대의 약점만을 들춰내는 말싸움만 하고 있어 참으로 민망하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삼일이라도 안거에 들어가는 자세가 되고 일정한 기간 인성 윤리교육을 평생교육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받아 이 땅에 밝고 맑게 하는 겸손한 정치인들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옛 성인의 말씀에 사리(舍利)가 방광(放光)하는 것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더라도 바른 안목이 없다면 범부라 했거늘 깨치지 못한 우리 보통 사람에게 어찌 해 안거의 날이 있겠냐만 “각자가 견성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하안거 해제 날” 이라고 하신 노스님에 말씀의 의미를 귀담아 듣는 정치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안호원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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