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난 직후 막을 내릴쯤이면 관객들은 한마음이 되어 박수를 쳐준다. 이는 좋은 연극을 보여준 연기자들에 대한 예우이자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도 있다.

이례적이긴 하지만 막이 내린 후 무대가 다시 환하게 밝아지면서 제일 먼저 단역들이 나가고 그다음에 조연들, 그리고 마지막엔 주연들이 무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연기자와 관객의 호흡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른 연기자와 달리 연극배우의 경우 가장 큰 기쁨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마 ‘커튼 콜’에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들릴 때일 것이다.

이 같은 희열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고 또 빼앗길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희열감을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설명 할 수가 없다.

몇 해전 두어시간 짜리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아마추어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선 것이지만 3백여명이 넘는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은 적이 있다.

여주인공과 함께 양쪽으로 나오면서 손을 잡고 인사를 할 때 관객석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무아의 지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어쩜 연극인들이 이런 맛에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며 연극을 지키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6일은 석가탄신일이다. 이 날 형무소에서 특사로 나온 죄수들도 있지만 이 날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지 모르겠다.

주지 스님? 행자? 아니면 보살?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기 위해 절에 등을 다는 데 등급이 있고 시주금이 각기 다르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불자(佛子)가 아니라 그 깊은 뜻을 모르겠지만 어쩐지 사찰에 달리는 연등에 등급이 매겨지고 크기가 다르다는 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더구나 세계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석가모니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날이련만 연등 크기를 달리해 차별화 된 시주금을 불자들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안주도량(安住道糧) 호지불법(濩持佛法) 즉 도량을 편히 안정하고 불법을 지켜야 할 주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고 개인의 탐욕으로 불자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필자가 알기에는 스님들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몸소 실천하는 수행자로 알고 있다.

세속의 모든 욕심을 털어버리고 오직 정진하며 고행을 통해 마음을 닦는 그런 수행자들이 있는 사찰에서 연등의 크기를 달리해 시주금을 매긴다는 건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더구나 불사(佛寺)를 짓는 다고 목표를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시주금을 걷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석가탄신을 축하하기보다 오히려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수 도 있다.

이런 날은 불자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만큼의 시주금을 받아야 하고 평등의 원칙에 따라 연등의 크기도 같아야 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사찰에서까지 벌어져야 하는 가?

이 세상에서 내 것은 없다 . 그래서 잊은 것은 있을지라도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내 작은 몸뚱이조차 내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마들이 땅에 금을 긋고 땅 따먹기를 하며 난리를 피우다가도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면 아무 미련없이 훌훌 털고 일어서는 것처럼 최소한 종교인들이라면 그런 아이들의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 까 한다.

부자든 가난한 자 든 너 나 할 것 없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

천지(天地)의 이치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어디에 두고 욕심을 부리는지. 석가의 탄신을 축하하는 날 . 누가 박수를 받고 누가 주인공인지를 먼저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안호원(사회·교육학박사,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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