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사의 면담 관계로 워커힐을 갈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후문 쪽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봄 빛 햇살이라서 그런지 늦은 오후였지만 제법 날씨가 따사로웁다.

무심코 벚꽃 목련화 잎을 보았다. 그처럼 아름답던 꽃들이 지는 추한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만개(滿開)된 벚꽃놀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일내며 몰리던 그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 누구를 그토록 유혹하기 위한 아름다운 자태였던가.

문득 그처럼 아름다웠던 꽃잎들이 길거리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에 무참히 밟히는 꽃잎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나의 허상(虛象)을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꽃잎이 질 때는 외면하는 사람들. 묵묵히 땅에 떨어져 발길에 짓밟히는 시든 꽃잎 속에 깊이 감춰진 시간의 우울, 오랜 시간 모진 풍파를 지켜온 고통의 무게가 어쩜 차라리 가식적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는 우리네의 슬픔으로만 여겨졌다.

그 같은 까닭은 그것이 바로 소멸, 죽음으로서의 희생적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리라.

과연 아름다움이란 말을 표현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처럼 아름답다고 말들을 한다.

이처럼 꽃이 아름답게 기억되어지는 것은 “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는 더 없이 단명한 생명을 지니고 아침이슬처럼 잠시 피었다간 이윽고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우리도 죽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유일한 생명 속에서 일회적(一回的)인 생애를 보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서는 지혜롭고 슬기롭게 생활하며 사랑으로 이 생을 값있게 후회 없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끊을 수 없는 힘은 무엇인가?

소외된 자, 특히 거리의 여자들에게 그들이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순수한 “사랑의 키스”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를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하고 불신풍조가 만연하게 하는 족속들은 소외된 자, 거리의 사람들보다는 “사랑”으로 포장된 위선과 독선 교만 그리고 무례히 행하는 자 들일 것이다. “사랑”은 교만하거나 계산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무욕(無欲)에서 나눔의 사랑이 이뤄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참다운 가치를 찾게되리라 본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다. 어느덧 또 한 날, 한 계절이 지나 가고 우리는 늙어 가고 있다. 아비귀환의 아우성으로 짓밟히는 인간애(愛)의 상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이다.

지난 14일 그토록 외로운 병상에서 사람을 그리워했지만 이제는 그런 그리움마저도 없이 잊혀지는 사람이 되어 하얀 국화송이에 묻혀 한 줌의 재로 머언 길을 떠나는 연예인 “이미경”을 보며 착잡한 마음이 든다. 그녀는 자신이 갖고있던 모든 것, 아름다움까지도 이승에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방안 가득히 있는 하얀 국화송이가 무슨 소용이며 노란 국화꽃으로 장식한 영구차인들 떠나는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담겨있겠는가? 당연히 맞이하는 죽음의 길이지만 그 길목에서 늘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엉뚱하게도 그 옛날 거리거리 집집마다 목탁을 두들기며 고행하던 수도승의 모습이 떠오른다. 백발번뇌를 끊고 선인의 행적을 추모하며 불타(佛他)의 길을 걷는 이름 모를 탁발승의 정신이 더욱 그리워지는 때인 것 같다.

탁발한 양식을 뿌려 하늘의 새 떼를 먹이고 굶주린 걸인에게 나누어주는 무욕(無欲)의 인정이 어느 때보다 그리워진다.

얼마 전 필자가 강의 중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잊은 것은 있어도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분명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다. 그런 까닭에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생활하며 기억에서 잠시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것, 내가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게 없다.

이제라도 소유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에서 한번쯤이라도 자신을 돌이켜보며 삶의 보람을 찾고 그 아름다움을 지닌 마음으로 봄 날씨처럼 따스하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청명한 날씨가 차라리 슬프도록 포근한 봄 날 오후.

봄비라도 내려 지저분하고 더러운 거리를 씻고 메마른 우리네 가슴에 포근한 사랑을 촉촉이 적셔주는 그런 비가 내렸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도 간혹 상가(喪家)를 찾아보는 것도 삶의 가치,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논설위원 안호원(사회·교육학박사,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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